“한 발, 두 발, 세 발, 네 발!”
어제 네 발까지 걸었던 조카 녀석들이,
“여섯 발, 일곱 발, 여덟 발, …, 열네 발!”
오늘은 열네 발까지 자신의 발자국을 찍는다.
“어떻게든 되겠지.”
당신, 진짜 취직 안 하고 그러고만 있을 거야? 대학교 4학년 때 동생이 내게 물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성의 없는 내 대답에 동생은 대화를 끝내 버렸다. 나는 그 당시 철도 없었고 생각도 없었다. 그래도 나는 성실하게는 살았으니까 ‘어떻게든 잘 되겠지’라고 세상을 만만하고 가볍게 생각하였다. 나에게 큰 보상을 주던 세상은 아니었지만 큰 분노나 좌절을 안겨 준 세상도 아니었기에 ‘어떻게든 헤쳐 나갈 구멍’ 하나쯤은 마련해 주겠지, 라는 매우 안일한 생각으로 내 미래를 점쳤다. 어떻게든 되겠지, 뭐 망하기야 하겠어?
하지만 나는 망했다. 우선은 여섯 번 봤는지 일곱 번 봤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임용고사에서 일단 망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부모님이나 동생에게 은혜를 갚을 길이 막혀 버렸다. 수험생활, 아니 내게 수감생활과도 같았던 그 수험생활은 이미 갈 데까지 간 상태였다. 나는 망연자실하기보다 오히려 무덤덤하게 불합격을 받아들였다. ‘그래, 난 망했다.’
‘너 그래도 열심히는 살았잖아.’
나는 나 스스로에게 변명과 위로를 건넸다. 지각도 거의 하지 않았고 학창 시절 통틀어 12년 개근상에 맞먹는 12년 정근상도 거머쥐었다.(단 하루의 조퇴가 아쉽다.) 학교, 집, 독서실, 학교, 집, 독서실. 부모님 속을 썩인 적도 있었지만 ‘학교-집-독서실’이라는 삼각형 안에서 조용히 머무르며 학창 시절을 보냈다.
그런데도 망했다.
하루 24시간을 나노 단위로 쪼개 쓰며 수험생활에 몰입하던 나였다. 그러나 수험생활을 포기한 후 나는 내 하루를 마구마구 쓰기 시작했다. 내가 시험을 버린 후, 아니 시험이 날 버린 후 한동안 나는 ‘내가 온종일 했어야 하는 일들’에 더 이상 동그라미나 가위표 따위를 그리지 않았다. ‘어차피 또 망할 텐데 이딴 거 해서 뭐 하나.’ 나는 열심히 하고 망하느니 열심히 안 하고 대충 놀다 망하기로 하였다. 어차피 한 발 두 발 걸어봤자 늘 제자리였다. 뛰고 싶은 사람에게 ‘넘어지기만 하는 한 발자국’의 걸음마는 오히려 더 불쾌할 뿐이었다.
“이름은 뭐로 할까?”
“진, 선. 외자 어때?”
“예쁘긴 한데 그 이름들은 탤런트 이름이기도 하지 않아요? 그건 좀.”
“그럼 이건 어때? ○○, ○○!”
가족들은 조카들에게 처음으로 달아줄 이름표를 고민하고 있었다. 이 가족 저 가족에게 이름을 응모하고 있었고, 상품도 없는 공모전에 이모까지 가세해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이런저런 토론 끝에 ‘쌍둥이 이름 공모전’에는 외할아버지의 의견이 당선되었다. 아직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이었다. 그렇게 모두 새 생명을 조심스럽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바야흐로 2015년 4월이 찾아왔다. 응애응애, 라는 단 몇 음절로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거룩함이 한꺼번에 둘씩이나 달려왔다. 여전히 ‘인생, 어떻게든 되겠지’라며 살고 있던 이모도 아이들의 탄생이 마냥 신기해서 신생아실을 서성이며 면회 시간을 조급하게 기다리곤 하였다. 그때 당시에는 나에게도 또 다른 이름이 주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 이름에도 '한 발, 두 발, 세 발, 네 발' 그 이상이 필요하다는 것도 잘 몰랐다.
생전 처음 갓난아기를 안아 본 이모는 너무나 가벼운 생명체 앞에서 어쩔 줄을 몰라 하였다. 가만 보니, 아이를 배고 아이를 낳고, 아이가 세상의 티끌에 다치지 않도록 애쓰는 일은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말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삶들이었다. 이렇게 가벼운 생명체를 안는 일이, 사실은 무척이나 무거운 책임감을 지니는 일이었다. 그걸 몰랐다. 갑자기 가슴 저 밑바닥에서 뻐근하게 무언가가 올라오고 있었다.
이모는 태어난 지 한 달이 채 안 된 녀석들의 손에 손가락 하나를 맡겨 본다. 온 힘을 다해 손가락을 꽉 쥐는 아가들을 본다. 아가의 손가락에서는 ‘생(生)에 집중하는 힘’이 꿈틀거린다.
“이모는 뭐 하는 사람이야?”
아가들이 말을 하게 되고, 조금 더 크게 되면 혹시 이런 질문을 해 올지도 모른다. 나는 무얼 하는 사람이어야 할까? 그동안 나는 혼자서 되는대로 내 세상을 추측하였다. 하지만 2015년 4월이 왔고, 먼지만 날리던 이모 인생에도 또 하나의 봄이 찾아왔다. 그 봄들이 언젠가는 나의 미래를 물어 올 것이다. 이모는 뭐 하고 살 거야? 그때도 내 조카들에게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있을까?
어떻게든 되겠지?
“한 발, 두 발, 세 발, 네 발!”
어제까지만 해도 네 발까지 걸었던 조카 녀석들이,
“우다다다! 와다다다!”
오늘은 저 멀리까지 앞서 나가며 이모의 폐활량을 앞지른다. 아니, 언제 저렇게 달리기 실력이 는 거야?
"우리가 이모보다 더 바뻐, 엄마랑 아빠보다도 더 바뻐."
어린이집 최고참이 된 우리 조카들. 사회적 '오빠'가 되고 사회적 '선배님'들이 된 조카들의 첫 푸념은 이것. "이모보다 더 바뻐." 너무 일이 없어 보이는(?), 자기네들이 놀자고 하면 엄청 잘 놀아 주는 것으로 보아 일은 안 하고 놀기만 하는 것 같은 이모에 비해 자기들은 엄청 바쁜 느낌인가 보다.
조카들이 이제 본격적으로 사회적 기지개를 켠다. (어린이집 졸업과 초등학교 입학이 머지않았다. 우리 조카들은 유치원은 건너뛰었다.) 나도 남부끄럽지 않은, 아니 적어도 조카들에게만큼은 부끄럽지 않은 기지개가 필요하다.
불과 얼마 전까지의 나는 나 자신을 심하게 내려놓고 살았고, 내 미래를 종종 방관하며 살았다. 하지만 절대적으로 나를 사랑해 주는 내 앞의 아가들을 본다. 조카들의 눈빛이 너무나 맑디맑아서 어느 때는 갑자기 수정체 뒤쪽에서부터 이슬 같은 것이 쉼 없이 올라와 내 시야를 가린다. 소중하면 원래 이렇게 자꾸 눈물이 나는 건가. 그럴 때면 생각한다. 절대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쉽게 내려놓을 수가 없다.
‘어떻게든 되겠지’는 더 이상 내게 없다. 이제 나도 ‘어떻게든 되도록’ 해야 한다.
이모가 변명하며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도 너희는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너희는 목을 가누고, 트림도 곧잘 하고 방귀도 사람답게 잘 뀐다. 배도 밀 줄 알고 기기도 하며, 이제 두 발로 서기까지 한다. 걷는다는 게 스스로도 너무 신기해서 땀이 나도록 한 발, 두 발, 세 발, 네 발, 다섯 발을 끊임없이 연습하기도 한다. 그리고 너희는 이제 앞으로 뛰어나가기도 간다. 아무개야! 이제 자기 이름에 뒤를 돌아다볼 줄도 안다. 너희는 건강하게 무럭무럭 너희들의 생을 온전히 살아 내고 있다.
한 발, 두 발, 세 발, 네 발. 사회적 첫발을 떼어 가는 너희다.
너희를 생각하며 나도 이제 다시 내 인생에 이름 하나를 붙이려고 한다. 바로 ‘이모’라는 이름. 내 이름을 부르는 너희의 목소리에 응답하고자 한다. 어쩌면 이모도 이제 곧 목을 가눌 수 있을지도 모른다. 너희처럼 걷는다는 일에 즐거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너희처럼 언젠가는 맘껏 이 세상을 뛰어다닐 수 있을지도. 너희를 만나고 나서 나는 좀 더 훌륭해지고 싶다. ‘어른’이 되지는 못하더라도 부끄럽지 않은 ‘이모’는 되고 싶다. 너희가 내게 부여한 ‘이모’라는 이름에 누가 되고 싶지 아니하다. 왜 그런지 이유는 잘 모르겠다. 다만 너희 둘이 나를 종종 바라다보는 그 눈빛을 생각할 뿐이다. 그럴 때마다 더 훌륭해지고 싶다.
내 두 번째 이름, ‘이모.’ 그 이름을 받았으니 나는 이제 어떻게든 잘 살아가고 싶다. 조금 더 다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싶다. 이것은 너희가 나에게 준 숙제이자 선물이다.
이모도 이제 부끄럽지 않은 봄을 준비해야겠다.
너희를 위해서, 또 나를 위해서.
(사진: manfredsteger@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