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유를 먹으면 탈이 나는 체질인데도 나는 평생을 '우유(優柔)'와 '부단(不斷)', 이 두 녀석을 끌고 다녔다. 작게는 음식 선택에서부터 크게는 사람을 사귀는 일까지. 더 크게는 직업을 결정할 때조차 나의 이 '우유부단'은 끊임없이 나를 따라다녔다. (안 되는 건 안 된다고 말을 해야 한다고 가족들에게 혼이 나길 여러 번.)
그랬던 내가 오늘은 우유와 단호박 사이에서 의사를 결정, 아니 결단을 내 버려야 할 일이 생겼다.
"진로 체험 신청이 들어왔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강사님들이 편히 이야기해 주세요."
편히? (정말 편해도 되나요?) 혹시 무조건 해야 하는데 그냥 묻는 것은 아닐까?
내가 프리랜서로 일하는 전시관은 우리말 체험에 특화된 전시관이어서 청소년들의 진로탐색과는 거리가 좀 멀다. 아니 꽤 다른 결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유를 먹을 것인가 단호박을 먹을 것인가.
다른 강사님과 몇 분의 통화를 하면서도 갈피가 서지 않았다.강사님의 의견과 운영 인력 선생님의 말씀, 그리고 돌아가는 상황 등을 고려하면 딱히 거절할 명분이 없어 보이기도 했다. 지금 당장 체험을 만드는 일이 힘들면 2학기 때 천천히 준비해서 진로 체험을 실시해 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내 안에 숨은 어떤 본능이, 혹은 어느 직감이 자꾸 이건 아니라고 신호를 보낸다. 2017년에도 이런 일이 있었고, 꽤 난감한 결말이었던 기억이 있다. 이도 저도 아닌 체험이었다고나 할까. 강사는 분명 학예연구사가 아닌데도 체험을 하러 오는 청소년들은 학예연구사의 직무에 관해 묻곤 했다. 이게 맞는 걸까, 싶었다.
'자칫 엉겁결에 첫발을 내디디다 쭉 진창에 빠질 수도 있겠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계속해서 이런 식의 '변형된 요구'가 들어올 것이고 그럼 우리 강사들은 한번 트인 물꼬에 휩쓸릴 것이 뻔하다.
가장 오래된 경력자가 하필 나였기에 내가 '우유부단'을 계속 들이붓는다면 외려 여기저기 민폐가 될지 모른다. 우리 기관의 연락을 기다리는 진로체험센터에도 중간에서 연락을 맡으신 담당 선생님도.
제 생각에 전시관은 '전시관 체험'으로만 정체성을 가져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저희가 진로 체험을 대신해 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학예연구사의 전문적 업무를 전달하는 일에도 한계가 있다고 봅니다. 저희 체험을 진로 체험으로 잘 포장할 자신도 없고요. 이게 제 의견입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나의 이 결정이 내 일터에 어떤 영향, 어떤 파장을 불러올지는 아직 잘 모른다. 나의 결심이 이 기관과 배치되는 결론을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유부단 경력 만렙'인 내가 살아오며 깨달은 것 한 가지. '유연한 확장'이 좋을 때도 있지만 그것을 명분으로 정체성을 갈아엎으면 배는 산으로 가고 뱃사공은 제대로 노를 젓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