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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책장봄먼지 Jun 28. 2024

살릴 기회

세상에 태어나 두 번째로 잘한 일... 저는 오늘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지난주 일요일 저녁에 겪었던, 그리고 그때  두었던 에피소드.)




집에 돌아와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심장이 쿵쾅거린다. 대체.. 내가 어떻게 그 일을 해냈을까...!



세상에 태어나 가장 잘한 일은 쌍둥이 조카 육아로 가족들이 힘들어할 때 '일부러' 직장을 관두고 육아에 동참해 버린 일. 후회는 없다. 나 자신보다 더 소중한 조카들을 생각해서 '저지른(?)' 사랑이었으니까. (물론 당시 다니던 직장이 심히 별로이긴 했다.)


그런 내가 세상에 태어나 거의 두 번째로 잘한 일을 드디어 '오늘' 만나고야 말았다.



문득 어느 청소년 소설이 생각난다. '옆집의 영희 씨(저자 정소연)'라는 단편집 2부에서 소설 속 주인공은 우주비행사 자격시험을 본다. 실력이 월등하여 당연히 통과하리라 믿었던 시험이었지만 난관에 봉착하고 만다. 시험 도중 어느 (우주) 여객선이 구조 요청을 보내온 것. 망설였겠지만 주인공은 시험을 포기하고 그 가족을 구했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르고 당시 애인이었던 옛 남자 친구가 주인공 앞에 나타난다. '네가 그때 살린 가족은 잘 살고 있으며, 사실 네가 그런 일을 겪고 나서 나도 그런 일이 닥쳐 자격시험을 놓칠까 봐 두려웠다'고 말한다. 너 같은 결정을 해야 할까 봐 무서웠다고.

그때 주인공 여자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건 정말 바보 같은 걱정이었네. 사람 구할 기회가 그렇게 쉽게 올 줄 알았어?"

 


그런데 나는 기회가 왔다. 나는 오늘 선택받았다. 누구라도 그 자리에 있었으면 나처럼 그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자리에 오늘은 내가 있었다. 물론 사람을 구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살아 있는 무엇이었다.


"갇혔어, 갇힌 거네!"

자연 다큐 전문가인 아버지는 보자마자 상황을 파악하셨다.

"어머, 어떡해, 어떡해!"

"네가 살살 잡아서 올려 줘 봐."


그래, 이건 내가 할 일이다. 직감했다. 해야만 하는 일, 그리고 내가 평소 하고 싶어 했던 일이다. (워낙 평소 착한 척을 좋아한다. 결정적인 순간에 걸음아 날 살려라, 얼른 내빼긴 하지만.)


"아윽. 어떻게 해요. 자꾸 도망가. 내가 자기 잡는 줄 알고. 악. 잠깐만 잠깐만, 오리야, 오리야, 내가 구해 주려고 그러는 거야. 이리로 이리로. 악 그리로 말고!"


마다하지 않았다. 팔을 걷었다. (아니구나. 정확히는 점퍼를 잠그고 손목까지 옷을 내렸다. 다행히 오늘따라 긴팔 옷을 걸치고 싶더라니. 야생동물은 거의 처음 만지는 거라 나도 살짝 긴장하였다.) '할 수 있다!'를 내적으로 외칠 틈도 없었다. 그저 나는 내 손을 피해 가는 녀석을 계속해서 뒤따르며 그 좁은 그물망 사이에서 고군분투했다. 풀숲 사이를 헤치고 녀석에게 쉼 없이 손을 뻗었다.


(사건 종료 후 찍어 둔 사진)


그러나 상황은 악화일로. 사실 그 그물은 우리 공원의 마스코트인 거위들 때문에 설치한 그물 펜스였다. 연못에서 공원 쪽으로 올라오는 일이 없도록 하려고 공원 측 관리자들이 1년 전쯤 만들어 놓은 '그물 벽'이었다. 그러나 이 물새연못이 낯선 오리 녀석에게는 덫으로 느껴질 법한 그물이었고, 아무리 날갯짓을 해도 빠져나가지 못하는 올무였다. 오리는 덫에 빠졌다 생각하니 더 가쁘게 날갯짓을 하며 퍼드덕거렸다. 게다가 사람까지 자기를 잡으러 오다니, 절체절명의 절망이었을 것이다. (물론 자기를 잡으러 왔으리라 생각한 '그 못된 사람'은 '바로 나'였을 테고.)


설상가상 그 오리는... 낳은 지 얼마 안 된 새끼 오리 세 마리의, 어미였다.  


열흘 전에 만난 오리들이지만 나의 카메라 앨범을 채워 주고 나의 마음을 채워 주고 나의 산책길을 채워 주고 나의 자연을 채워 주던 녀석들이다. 나서야 한다. 이들을 아는 내가 나서야 할 차례다. (우린 구면이야, 오리야, 겁먹지 말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옴짝달싹할 수 없는 그물 구석에 가서야 오리가 움직임을 잠시 멈춘다. 그물코에 부리가 걸렸고 고개는 80도쯤 꺾였다. 그 모습에 인간인 나조차 경악한다. 저러고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저러다 스트레스로 지레 탈진할까 걱정이다. 어미치고는 작은 몸이었는데 그물에 콱 걸려 버린 후 더 몸집이 작아진 듯 보인다.


"자, 잠깐만. 내, 내가 올려 줄게, 구해 줄게."


인간의 언어를 알아듣지는 못하겠지만 일단 소통은 시도한다. 적의가 없는 인종임을 나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알리며, 0.1초의 망설임 후 흰뺨검둥오리의 부리를 슬며시 그물코에서 빼낸다. 여기까지는 반항이 없다. 그러나 날개 부분을 휘감아 몸집을 감싸 쥐는 순간,


퍼드덕퍼드덕 푸드덕푸드덕.


"괘, 괜찮아. 괜찮아."

나에게 하는 말인지 녀석에게 하는 말인지 나조차도 헷갈린다. 조심히 녀석을 품에 안듯 감싸 쥔 후 1m 즈음 되는 그물 벽에서 녀석을 천천히 끌어올린다. 조심조심, 그래그래, 조심조심.. '우린.. 할 수 있어..!'


드디어 녀석을 내 이 두 손으로 안았다!

그런데 어떻게 날려야 할까. 오리에겐 꽤 높은 높이라 살짝 놓아도 던지는 모양새가 될 것 같다. 슬쩍 놓아두면 되려나. 나는 나의 두 팔에서 조금씩 달아날 준비를 하는 녀석을 그물 밖으로 슬며시 내놓는다. 공중에 내어놓는 순간 바닥으로 떨어질 뻔하던 녀석은 포드닥포드닥 소리를 내며 땅 위를 가로질러 저 위 물새연못 속으로 힘차게 날아간다.

아, 맞다! 녀석은 날 수 있으니까!


녀석은 날개가 있다. 날 수 있다. 그물에 걸려 잠시 날개를 잊었겠지만 녀석에겐 날개가 있다. 녀석이 그것을 잊지 않아 다행이다.



살릴 기회.

너를 살릴 기회가 내게 와 주어 그것도 다행이다.

아무에게나 오는 기회가 아니라는데... 정말 나는 행운아다. 그 자리에 내가 있을 수 있어 다행이다.

 

이제, 나 동물 살려 본 사람이다!

그래, 한 번 살려 봤으니 두 번 세 번..! 앞으로는 얼마든지 살릴 수 있을 것 같다...! 이러다 나 자신까지 살릴 수 있을지 몰라!! (그..그렇겠..지?)



오늘을 돌아보니..

다행이라 느끼는 일들이 참 많다.

오늘따라 그 물새연못 의자에 앉자고 제안하신 우리 엄마.

그물 뒤에서 무언가 푸드덕거리는 소리와 형체가 신경 쓰였던 오늘의 나.

보자마자 오리의 위급 상황을 눈치챈 우리 아빠.

일주일 전 너를 만난 후 매일같이 너와 너희 가족을 보려고 산책길을 재촉 우리 가족.

그리고... 또 다행인 것은.. 나...


지금까지 살아 있길 잘했다! 참 쓸모도 없이 그냥저냥 너무 막사는 것 같았다... 별다른 성취도 성공도 없이 왜 이렇게 인생이 흘러가나, 대체 내 인생, 어찌 흘러가려 그러나, 낙심과 낙담을 반복한 적도 많았는데.. 내가 너를 살리려고 그랬나 보다! 그래서 여태 대충이라도 살아오고 있었나 봐!



이보다 더 자랑스러울 수 없는 마음으로 집에 돌아가는 길,

-아까 네가 오리 잡고 있는 거, 사진이라도 하나 찍어 둘걸 그랬다.

뒤에서 '구조 코치'를 해 주셨던 아버지의 뒤늦은 말씀이다.

-아니, 내(우리 엄마)가 찍으려고도 했는데 지금 오리가 엄청 위급한 상황인데 그 와중에 카메라 들고 찍는다는 게 좀 그렇더라고.


나의 구조 작업엔 목격자가 없다. 아쉽기도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오리의 위급 상황을 한낱 나의 영웅 일대기로 만들면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해 주신 엄마의 그 마음도 참 고맙고, 오리의 위급 상황을 재빨리 눈치채 준 우리 아빠의 '자연관찰력'도 참 고맙고.


목격자가 없어서, 증거 영상도 없어서 나는 영웅담을 '유퀴즈'에 풀어놓지도 못할 것이며, '동물농장'에 나의 위대한(?) 선행을 제보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목격자가 없는 것도 아니다. 내겐 분명 인간 목격자 2인(엄마, 아부지)과... 나의 팔과 나의 이 두 눈이 목격자이니까.. 그리고..

가장 중요한 목격자가 있다...!

바로바로 목격자이자 당사자인... 바로 어미 오리!



조금 전 생사를 오갔던 것도 잊고 오리는 여유롭게 물장난을 치고 있다. 다행이다. 아픈 일은 얼른 잊는 게 낫지! (어미 오리는 십년감수를 한 후 새끼오리를 10분 가까이 찾았다. 그러나 새끼들이 보이지 않아 어미 오리도 우리 가족도 애타게 새끼오리 세 마리를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저 멀리서 새끼오리 세 마리가 보였다. 고개가 이던 위기도 잊고 어미 오리는 버선발, 아니 오리발로 새끼오리를 향해 재빨리 헤엄쳤다.)



오늘 나는 내 인생에 큰 자국을 남겼다. 그 자국은 내게 말한다.  '오늘 오리를 안았던 일네가 세상에 태어나 가장 잘한 일 가운데 하나.'라고.

그래, 내가 가장 잘한 일. 오리, 너희들을 눈여겨보며 사랑한 일.


그리고 너를 살린 일. 너는 곧 잊어버리겠지.

하지만.. 우리가 잠시 만났던,

너의 자그마한 몸과 나의 조심스러운 두 손이 만났던 그 나의 순간만큼은... 너에게 무척 따뜻하고도 다행스러운 순간이었으리라 믿는다.

나의 두 손도 아직 너의 그 따뜻한 체온을 기억하고 있으니까.



고마워, 살아 줘서!!

앞으로 어느 오리를 보더라도 난 이제 무조건 행복하고 뿌듯할 것이다. (내가 살린 오리인가? 오리의 새끼인가! 하면서.)


누군가를 살리는 힘과 사랑하는 힘.

그 힘만으로 나는 몇 날, 몇 달, 혹은 몇 년을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잠시 잊고 살더라도 내가 꽤 대단한 일을 했다는 '착각' 혹은 '자각'으로, 문득문득 나 자신을 칭찬하며 나를 아껴 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나는 오늘 칭찬받아 마땅하다.

(너무 과하게 내 자랑을 늘어놓은 것 같아... 더 자랑할 수도 있었지만 여기서 이만 '자랑 파티'를 마칩니다.)


후기1: 오늘 다시 너희를 만났다. 평화로운 한때를 보내는 너희들. 너희 가족의 일상을 지켜 냈다는 기쁨이 오늘의 나를 채운다.

후기2: 너를 안았던 그때 그 감촉을 난 잊지 못한다. 네가 내 손을 떠나 자유로이 물살을 가르며 착지하던 그 아름답고도 멋진 날갯짓이 아직도 생생하다.

보고 또 보아도 자꾸 예쁜 너! (초보 어미 오리,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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