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널이 끝난 전철 문 앞을 쳐다본다. 나이 드신 분들이 여럿 탑승하시는 모습을 목격한다. 평소 착한 척을 하다가 마을버스에서 세 번이나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한 적이 있다. 그래, 나는 앉을 수 없는 팔자인가 보다, 라고 생각하며 그대로 서서 갔다. 착한 척을 하려거든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모습을 보여야 할 텐데 마음은 그렇지 않을 때가 많다. 전철을 탄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다.
'아, 오늘은... 힘든데... 그래, 잠을 자 버리자. 눈을 감아 버리자.'
이렇게 유독 엉덩이가 무거워지던 순간,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
"여기 앉으세요."
앞쪽에서 쑥 일어난 어떤 청년이 자리를 양보한다.
"어, 괜찮은데... 고마워요."
세상일에 눈감던 나는 슬며시 자는 척을 중단하고 청년을 쳐다본다.
'착하다. 복 받아라.'
나는 착한 일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복 받아라'라고 중얼거린다. (마음속으로 외칠 때도 있고 주변에 듣는 사람이 없다면 정말 육성으로 내뱉을 때도 있다.) '복'이 무엇인지 잘 모르면서 무조건 복 받으라 외친다.
아 이런 뜻이었구나. 빌기만 했지 정확한 뜻은 몰랐다. 나 대신 잠깐의 희생을 선택해 준 사람들은 되도록 여러 복을 받았으면 좋겠다. 누군가의 눈 감는 척에 선한 공기를 불어넣어 주는 사람들. 자리를 양보하는 청년을 보며 우리나라의 미래가 밝구나, 라고 흐뭇해하다가 문득 얼마 전 버스 정류장에서 만났던 또 다른 귀인이 생각났다. (각박해지는 세상 속에서도 눈을 '씻고' 찾아보면 정말 귀인들이 여럿 있긴 있다.)
"저기요. 떨어졌어요."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려고 전철역에서 열심히 계단을 내려가던 우리 모녀. 우리의 귀에는 남의 말이 안 들린다. 우리가 타야 할 버스가 곧 온다고 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한테 하는 이야기겠거니, 한다. 우리는 발걸음을 재게 옮긴다.
"이거요. 떨어뜨리셨어요!"
헥헥 뛰어온다. 돌아보니 어떤 청년이다. 자기 일행인 듯한 어른에게서 잠시 떨어져 나와 언뜻 우리 쪽으로 급히 뛰어오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리 모녀는 '저 청년, 뭔가 바빠 보이는구먼'이라고만 생각한다. 우리는 청년의 목소리에 아랑곳 않고 버스로만 향한다.
그런데도 이 청년, 끈질기다. 버스 앞으로 종종걸음을 옮기는 우리에게 더 바싹 다가와 바통 터치하듯 우리 손에 이것을 건넨다.
-어머, 엄마 돈 흘렸었나 봐? 어머,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유유히 사라지던 청년. 감사합니다를 세 번 연달아 복창한 후 주변 사람 다 들으라는 듯 엄마와 청년을 칭찬한다.
-어머, 요새도 저렇게 열과 성을 다해 잃어버린 것을 찾아 주려는 사람이 다 있네!
-그니까. 3,000원뿐인데도 끝까지 와서 건네주고 간다. 대박. 복 받아야겠다, 저 사람.
멀리서 달려온 3000원의 행운. 잃어버렸어도 몰랐을 행운.그래, 정말 이런 사람들은 복 받아야 한다.
내가 다른 무언가를 크게 보상할 수는 없고... 그저 이렇게 이름 모를 그 청년들에게 다시 한번 크게 외쳐 본다.
복 받아랏!
정말 '복 받아야 할 사람'들이 많은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그런 의미로 이 글 읽으신 분들도 모두 복 받으세요.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