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공부'라는 구덩이에 빠져 허우적댔어야 할 고3 시절, 나는 '공부 안 하는 동갑내기 남자 친구'를 만나고 있었고, 그때 그 나의 첫 연애는 볼썽사나운 막장 연애로 끝나고야 말았다. (나는 매달렸고 상대는 한 번만 더 연락하면 너의 이 지질한 모습을 나의 부모님께 고하겠다며 나를 을러댔다. 한마디로 '진흙탕 이별'을 하였다.)
그런데... 세상에.. 그보다 더 '징한(지겹도록 끈질긴)' 연애가 있었다. 그렇게 사람에, 아니 사랑에 데고도... 다 늦어서... 나는..
평생을 따라다니며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샅샅이 뒤져야만 마음이 편해지는 또 다른 녀석과.. 결국, 급기야 다시 연애를 시작해 버렸다. 그게 누구인지는.. 이제 말 안 해도 짐작하셨으리라... 불..안... 씨...ccc.. ic..ec...
-이 일, 괜히 한다고 했어, 아이씨.
다시 돌아와서 프리랜서로 강사 일을 해 줄 수 없겠느냐는 제안을 덥석 문 이후로 나는 한동안 매일같이 후회했고 그 후회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하지만 먹고사는 문제라 섣불리 이 직장과 헤어지지를 못하고 있다. 게다가 '불안'이라는 내 애인이 극구 말리고 있기도 하고. (너 이거 아니면 뭘로 먹고살려고 그래? 먹고살 수나 있고? 나이 생각 안 해? 부모님 생각 안 해? <-> 아이코, 알았다고요, 팩폭 그만 좀 합시다.)
다시 돌아오라는 옛 직장의 제안을 수락한 후 아마도 나의 '불안 씨'는 내 안에서 운신의 폭이 넓어졌다는 것을 스스로도 능히 깨쳤나 보다. 아주 어깨를 활짝 펴고 내 마음의 방 여기저기서 날갯짓을 퍼드득거리고 난리도 아니다.
"봄봄(=나) 강사님이 다른 초임 강사님들 앞에서 시연 좀 해 주셔야겠어요."
"연구관님도 내려와서 이번 체험, 참관하신대요."
"인플루언서 초청해서 홍보 좀 하려고 해요. 체험 제대로 준비해 주세요."
눈앞에서 체크리스트를 들고 나의 행동 하나하나엑 매서운 오엑스를 그리는 과장님과 관리 선생님 등등. 그들을 보며 혼자 덜렁 무대 앞에 선다. 눈앞은 노래지고 머리는 하얘진다. 영혼은 바사삭... 건조기에 1시간 넘게 이리저리 마구 뒤흔들리다 이제 막 나온 듯 말라비틀어져 있다.
"올라가서 저희 얘기 좀 해요."
특히 작년에는 체험 하나가 끝나기만 하면 바로바로 나의 잘못된 점에 관해 피드백을 받았다. 나의 모든 것이 어차피 '고쳐야 할 지점'으로밖에 인식되지 않는 상황들이었다. 안다, 나도. 좀 많이 부족했다, 내가. 하지만 이래서 연예인들이 자신의 연기나 노래 지적을 받을 때마다 댓글 하나에도 일희일비하며 우울증을 호소하고 급기야 막장으로 가는 선택도 감행하는구나, 싶을 때도 있었다.
평소 대책 없고 심히 낙관적이었던 나였지만 한편으로는 심히 내향적이고 감성 위주의 사람이었던지라, 막장으로 달려가려는 나의 이 낯선 생각들은 걷잡을 수 없이 쭉쭉 퍼져 나간다. 이럴 때면 내 애인인 '불안 씨'의 예언은 어떻게든 꼭 들어맞는다.
거봐. 내가 너 결국은 제대로 못 해낼 거라 했잖아.
거봐.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라고 했잖아.
거봐. 너 후회할 거라 했잖아.
거봐. 너는 안 된다고 했잖아.
거봐. 너는 거기까지인 거잖아.
거봐. 내가 뭐랬어?
불안 씨가 내어놓는 '거봐' 예언에 힘없이 고개를 떨구고 있는데 급기야 불안 씨의 '거봐 예언'은 자화자찬의 지경에까지 다다른다.
거봐. 내(=불안)가 늘 네 옆에 있으니까 네 삶이 자꾸 다이내믹해지잖아!
나는 내 애인 불안 씨의 저 천연덕스러운 자기 합리화에 기가 질려 저 입을 틀어막고 싶지만 아쉽게도 남은 힘이 없어 그 자리에서 그냥 주저앉기를 선택해 버린다.
"왜 아직 안 와? 안 끝났어?"
집에서는 생각보다 퇴근이 늦어지는 나를 염려한다. 불거지고 퉁퉁 부은 눈으로는 집이고 어디고 들어갈 수도 없을 것 같았던 몇 개의 밤들을 기억한다.
그다지 들키고 싶지 않았던 직장 사람들에게까지 결국 그렇게 내 애인(불안)을 들키고야 만다. 이제 비밀 연애는 글렀다. 산통은 깨졌고 나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치와 어울리는지 만천하에 공개가 되어 버린다. 내가 불안을 쥐고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급하게 커밍아웃하여 버린 셈이다.
게다가 그런 날 밤이면... 가족들까지 미묘하게 바뀐 내 말투나 조금 부은 내 눈두덩이를 보고서 나의 이 끝나지 않은 열애를 눈치채 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