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는 이번 제사 참석을 건너뛰었다. 이젠 밤늦은 운전이 힘들고, 나이 든 작은아버지(=여든 오빠)가 제삿집에 참석하면 조카들이 불편할 것 같아서 방문을 생략했다.
동생: 네. 어제 음식을 엄청 많이 하더라고요. 아, 그리고 그 집 둘째 딸내미가 왔는데 이번에... ○○이 ○○라고 하더라고요.
오빠: 응? 뭐?
동생: 아니 그 현○, 둘째 딸내미 남편이 이른 나이에 교감이 됐다고 하더라고요.
오빠: 응? 이른 나이에 노안이 왔다고?
옆에서 '여든 오빠'를 지켜보던 '늙은 딸내미'는 이런 '엉뚱한 소통'에 당황한다. 희소식이 겸연쩍은 소식으로 뒤바뀐다. '여든 오빠'는 지금 스피커폰도 아닌데 휴대전화를 멀찌감치 들고서 외쳐 대는 중이다. 늙은 딸내미는 '여든 오빠'의 휴대전화를 뺏어서(?) 스피커폰을 얼른 누른다. 고모의 말을 좀 더 명확히 듣기 위해서다.
동생: 그리고 왜 있잖아요 택ㅇㅇ
오빠: 응 택 ㅇㅇ, 필ㅅ핀 가서 일한다며?
동생: 아니요 캠핑 안 갔어요.
오빠: 응? 필리핀 안 갔다고?
동생: 아니요. 필리핀에서 안 왔대요.
오빠: 아 그렇구나.
그래,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고 대화가 어디로 흘러가든 종착지만 있으면 되지. 여든 오빠와 살다 보니 세상의 잡음에 점점 관대해진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늙은 아이'가 갑자기 뛰어간다. 도착한 곳은 여든 오빠의 방.
요리 언니: 쟤는 갑자기 티브이 보다 말고 당신 방으로 왜 뛰어가?
여든 오빠: 몰라.
내가 뛰어간 이유는 나밖에 모른다. (나만 들렸기 때문이다.) 두 분은 다시 드라마에 집중하신다. (아직은) 귀가 밝은 늙은 아이가 제 아비의 방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들고 '거절'을 누른다. 스팸 전화다.
여든 오빠와 요리 언니: 뭔데?
늙은 아이: 아, 전화 왔었어. 스팸.
요리 언니: (여든 오빠를 향하여) 그니까 자꾸 애(=나) 뛰어다니게 하지 말고 티브이 볼 땐 거실로 좀 가지고 나오라니까.
요리 언니의 잔소리는 여든 오빠의 귓등에 늘 묻히고 만다. 성급히 울려 대는 휴대전화 벨소리는 티브이 소리에 묻히고 만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달린다.
벽에도 귀가 있고, 낮말은 새가, 밤말은 쥐가 듣는다 했는데 이 집에선 늙은 아이의 '귀'만 달린다. 그래도 좋다.
서로를 들을 수 있는 거리에 함께 늙어 가는 우리가 있다.
그렇게 함께 늙어가요, 우리.
*등장인물 간략 소개 1) 여든 오빠: 여든 고개를 넘어온 아버지. 초등학생 대하듯 하나씩 알려 주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 2) 요리 언니: 초등학생 대하듯 가르쳐 주는 것을 가장 잘하는 편이다. 여든 오빠의 아내. 3) 늙은 아이: 1번과 2번의 반려견, 아니 반려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