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가는귀먹은 내 앞으로 다가온 너

오지 마, 오지 마, 오...오... 올 거니?

by 봄책장봄먼지

너무나 데굴데굴 잘 굴러가던 시간이라고 착각하며 직장에서 한 해를 온전히 다 보내고 있었을 때.



그녀와 내 앞으로는 새로운 일들이 성큼성큼 들이닥치고 있었다. 우선 우리 둘만 소속 ‘과’가 바뀌었다. 공○○○과에서 교○○○과로 과 이동이 있었고, 게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찰떡같은 호흡으로 우리의 일을 잘 보아주시던 회사(용역 업체)의 차장님께서도 퇴사를 하셨다. 그리고 우리가 하던 업무를 전자 시스템으로 바꾸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관리자 및 신청자 홈페이지를 구성하기 위한 회의(나는 정말 뭔 소리인지도 잘 모르던 회의)도 잦아졌다.


그리고 점점 부풀어 오르던 '관계'라는 화산에서는 위태위태한 용암이 결국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그 용암을 따라 우리의 관계도 뜨거운 속도로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너무 둔했던 나는 뜨거운 줄도 모르고 상대의 화산, 그 앞마당에서 여전히 산책하듯 천천히 걸음마를 즐겼다. (상대 속이 터져 나가는 줄도 모르고.)



“저는 그냥 일하다 올라왔을 뿐이고, 업체에서 전화를 해 달라 하기에 한 것뿐이에요. 근데 다짜고짜 업체 대리님은 기분 나쁜 말투로 화를 내지, 나는 그 상황도 모르는데 다들 나한테만 이야기하지. 진짜 모르겠어요.”

“아마 선생님이 제일 잘 아셔서 다들 선생님께 말을 하는 건가 봐요.”


내가 눈치도 없이 염치도 없이 이런 말을 건네자, 그녀가 말한다.


“뭘 제가 제일 잘 알아요. 다들 들었는데 왜 나만.”

“…….”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다들 들었는데’에서 ‘다들’에 포함되는 대표 1인은 나였다. 나도 들었다. 그런데도 몰랐다. 내 능력치를 넘어서는 일이라 나도 모르게 그녀에게 큰 공을, 아니 큰 짐을 넘겼던 것이다. 뭘 모르면 알도록 해야 하는데 나는 그 부분에서 소홀했다. 그녀가 하는 말을 듣고 있노라니 딱히 틀린 말이 없었다. 아니, 어쩌면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그녀에게 나는 ‘자기 능력에 숟가락을 얹고 가는 사람’으로만 보였을 것이다. 실제로도 일부분 그러한 면이 있었고, 나는 그 부분을 미안하게 여기며 다른 자구책을 파내어 이 업무에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 자구책이란 대략 이랬다. 일찍 와서 수업 준비를 해 두고, 문단속을 잘하고, 촬영 인터뷰에 내가 대신 나서고, 하자는 대로 맞추고……. 참 소소하고 미천한 것들이었지만 나는 그 자구책으로 내 동료를 돕고자 했다.



하지만 일은 돕는 게 아니다. 일은 내가 스스로 알아서 해내야 하는 것이다.



‘도와줄게’가 아니라 ‘나도 할게’ 혹은 ‘내가 할게’ 여야 하는 것이 바로 ‘일’이다. 피해만 입히고 있는 걸까, 나라는 존재……. 점점 일에 대해서도 상대에 대해서도 급기야 ‘나’에 대해서도 회의감이 들었다. 그 당시 나는 입사밖에 모르던 나였고 ‘퇴사’의 ‘퇴’ 자도 고민해 보지 않던 나였다. 그런 나에게 업무 환경이나 업무 내용의 변화들은 자꾸만 퇴사로의 고민을 슬금슬금 제조해대기 시작했다.



‘잘하지도 못하는 이 일을, 나, 계속 붙들고 있어도 될까?’



그때였다. 때마침 회식이 있었다. 누군가를 다른 직장으로 떠나보내는 자리였다. 집이 너무 머니 굳이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업 담당자의 말을 듣고 나는 그 전날, 회식에 안 가겠다고 선언을 한 터였다. 게다가 그 회식이 정규직들을 위한 자리일지도 모른다는 옆 동료의 말을 들으며, '아, 그럼 내가 또 괜히 눈치 없을 뻔했구나.' 싶기도 했다.


그런데 회식 당일 아침, 그녀가 내게 늘 그렇듯 회사 메신저로 말을 걸어왔다.

-다른 선생님들한테 물어봤거든요. 근데 저희, 회식 가도 될 것 같아요. 과장님께 두 자리 남겨 달라고 했어요ㅋㅋ


회사 일도 중요하지만 가족들에게 회식을 안 가고 조카들을 돌보겠다고 미리 말을 해 둔 터였다. 먼저 한 약속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약속의 경중과 권위의 농도를 떠나서 나는 가족의 일을 택했다. 그때의 나는 단순한 마음이었다. ‘회식을 가고 안 가고’가 그녀에게 큰 영향을 미칠 일은 아니라고 느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답했다.

-저는 안 갈게요. 전 집에 가서 조카들 돌봐야 해서 회식 못 갈 것 같아요. 잘 다녀오세요 ㅋㅋ


(……)가 나갔습니다.



갑작스러웠다. 메신저 창에서 그녀가 나갔다는 문구만이 눈에 들어왔다. 이번 주는 사무실 대신 체험 장소에서 근무해야 하는 그녀였기에 우연히 메신저 창을 나간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왠지 모르게 느낌이 ‘싸했다.’



(……)가 나갔습니다.



나는 멍하니 메신저 창을 바라봤다. 그녀는 정말 나갔다. 우연히 나간 게 아니고 정말 나갔다. 아마도 그때부터인 듯하다. 그녀 인생에서 나도, 내 인생에서 그녀도 차츰 ‘나가기’ 시작했던 때가……. 사실 내 정신은 본격적으로 그때부터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일이라는 영역에서 그녀가 쑥 빠져나가자, 내 정신도 정신머리를 잃고 가출을 감행했다. 딱 둘이 붙어 다녀야 하는 일이었는데 한 사람이 손을 놓자 다른 한 사람이 균형을 잃었다. 안간힘이 필요했다. 물론 균형을 잃은 쪽은 나였다.


그녀는 나갔고 내 정신도 점점 나가기 시작했다. 어느덧 그분(퇴사)이 성큼성큼 내게로 걸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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