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덤벙에서 구원해 준 사람들이 있다. 나 혼자의 힘으로는 나를 구원할 수 없었을 때 그들은 작은 영웅처럼 나타나 나를 덤벙의 늪에서 구해 주었다.
첫째, 지갑을 찾아 준 미용실 아주머니.
"그 사거리에 있는 땡땡 미장원으로 오세요."
그 자리에 미용실이 있는지도 몰랐다. 정식 상호명은 미장원이었던 것 같다. 벌써 몇십 년 전의 일이니 지금처럼 '헤어'나 '살롱' 등의 언어를 붙이지 않는 게 통상적이었다. 거기에 내 구원이 당도해 있었다.
"여기. 다행히 전화번호가 있더라고."
"헉.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스무 살 때의 일이었는데 인사성도 없었는지 그때의 나는 감사의 음료수조차 안 들고 미장원에 들어섰던 것 같다. 덤벙은 넘치는데 배려는 넘치지 못했던 시절, 그런데도 그런 나를 구해 준 미장원 원장님. 지금은 그분의 얼굴도 미장원 위치도 기억나지 않지만, 나에게는 영웅 일대기의 한 장면으로 기록된 장면이다.
<지금도 머리 잘 말아 주고 계시겠죠? 늘 건강하시고 하는 일 모두 술술 잘 풀리시길요!>
둘째, 학생 내려요, 내려.
엇? 종점인가? 난 당시 종점에서 내려야 하는 직장에 다녔다. 그나마 서른 살일 때는 아직은 어려 보인단 소리를 겨우 들을 때라 어떤 아저씨께서 나를 학생, 학생, 급하게 흔들어 깨우셨다.
네? 저 내려요? 내가 내려야 할 곳을 생전 처음 보는 타인에게 물을 뻔했다. 엉덩이를 들썩이다 불현듯 내다본 전철 창밖은 종점이 아니었다. 아, 저 여기 아니에요. 안 내려요. 아저씨는 내가 종점까지 가지 않는 사람이라 생각했던 걸까. 두 정거장 전에서 날 깨우셨다. 그 정류장은 사람이 무척 많이(아니, 거의 다) 내리는 환승역이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니 아저씨는 내게 그런 배려까지 한 것이다. 종점까지 가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에 내가 그곳에 내리리라 생각하고 날 깨우셨다. 그분 덕분에 종점이 지나서까지 잠들었을지 모를 나, 그전에 미리 깨날 수 있었고, 그날 제대로 종점에서 내릴 수 있었다. 나를 덤벙의 종점에서 미리 구원해 주신 분이었다.
그리고 나를 덤벙에서 구원해 준 나의 가족들.
"태어날 때부터 야무졌어요." 하고 태어난 우리 엄마는 큰 올케가 시집을 오던 날, 그 야무짐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고 한다. "내가 시집올 때 아가씨(우리 엄마)가 네 살이었는데 아가씨는 그때부터 야무졌다니까요?" (사람이 어떻게 하면 네 살 때부터 야무질 수 있을까? 경이롭다.) 그렇게 매사에 일 처리가 반듯하고 야무진 우리 어무니는 오늘도 자기 큰딸을 향해, '아, 그거 붙박이장에 있더라', '아, 그거 내가 정리해 놨어, 다." 이런 말로 뒤치다꺼리를 하고 계신다. (누가 큰딸인지 몰라도 참 심하게 덜렁거리나 보다.)
아부지나 동생도 마찬가지. 내가 덜렁거릴 때마다 나타나 덜컹거리는 내 춤사위에 무게중심을 잡아 주셨다. 아마 그분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여전히 덤벙의 곡예 속에서 아슬아슬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내가 일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나를 '매의 눈'으로 지켜봐 준 가족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나 실수는 한다. 중요한 건 실수를 감싸안는 주변의 온도이다.
내 덤벙의 서사가 '수용'의 영역은 아니었더라도 '비난'의 지대까지 발을 내디디지 않은 건 나를 지켜 준 가족들, 주변 사람들 덕분이다.
나의 한 발짝, 한 발짝이 앞으로도
'실수 한 번' 그 뒤 '만회 한 번' 이렇게 균형의 추를 잘 맞춰 나가길 기대해 본다.
나의 구원자들이여,
앞으로도 나의 '덤벙', 잘 부탁해요!
(사진: he zhu@uns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