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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책장봄먼지 Dec 07. 2024

남의 덤벙 관찰기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 일이 끝났다는 연락도 없다.


-혀니야, 엄마 혹시 집에 있어?

-아니.

-연락도 없으시고?

-아, 엄마, 병원 들렀다 온댔어. 아, 잠깐만, 이모. 지금 암미한문자가 왔어. "도... 먹..래?"라는데?

-으응? 우리가 김밥 싸 놓고 김치 부침개놨는데? 어제 너희 엄마한테 반찬 가져가라고 미리 얘기는데 오늘 저녁에 도시락을 배달해 준다고 했다고?

-어.


저녁으로 김밥을 싸 주기로 어제 약속했는데 이상하다. 매사 정확하고 빈틈없어 보이는 동생'님'께서 무언가 다른 큰 그림을 그리고 계시는 건지? 궁금하다. 일단 동생에게 직접 연락해 보자.


-병원 가셨다면서요? 애들 배고플 것 같은데 우리가 김밥 직접 가져다줄게.


<아, 맞다ㅋ>


아, 맞다? 오잉? 이건 내 대사인데? 나만 쓰는 문장인 줄 알았던 '아, 맞다'가 철두철미한 동생 입에서 흘러나온다. 살다 보면 이렇게 타인에게서 뜻하지 않게 '나'와 닮은 조각 하나를 발견한다.  


<깜빡했어.>


응? 바리바리 음식을 준비한 엄니와 오후 내내 김밥 마느라 바빴던 나도 의아하다. 너가 깜빡하는 일이 다 있어? 좀체 덜렁거리는 법도 없고 무언가를 잊어버리는 일이 거의 없는 동생이다. 그녀에게서 갑자기 전에 없던 '인간미'를 발견한다. (너도 인간? 응, 나도 인간!)


사실 나는 '깜빡깜빡'하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그들이 내겐 꽤 호감이다. (자세히 보면, 귀엽지 않나요??) 남들은 답답하다고 하고 가끔은 한심하다고 하는 그런 류의 사람들. <덤벙 DNA>를 보유한 자들에게 특히 더 끌리곤 한다. 그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추측할 수 있으리라. 바로 내가 그런 DNA를 지닌, '깜빡 종족'이기 때문이다.


아, 참. 저처럼 깜빡 종족인 까마귀를 아시나요? <까마귀 고기를 먹었나>라는 속담의 유래를 아시나요? 초등 6학년 교과서에 나옵니다.


출처: 초등 6학년 1학기 5단원 <속담을 활용해요>


요약하자면, 까마귀가 옥황상제의 심부름을 하다가 그만 말고기의 고소한 냄새에 빠져 강도령에게 전해야 할 편지를 떨어트리고 만 것. (잊어버려 놓고도 깜빡하는 건 나랑 비슷하네;;)


 

그런데 그것도 아시나요?

덤벙도 세월에 부대끼다 보면 진화합니다. 화의 징후는 사소하게 시작됩니다.


<해야 할 일 목록>을 가지고 다니며 늘 확인하기.

메모지 모아 놓는 보관함을 따로 만들기(설령 그 보관함 위치를 까먹더라도)

주머니에 절대 휴지 안 넣기(넣어야 할 부득이한 사정이라도 끝까지 두 손에 쥐고 있기)

어느 자리에서건 일어서면 무조건 뒤를 돌아다보기

휴대폰에 끈 매달아 가지고 다니기



'덤벙꾼'들도 변화에 변화,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다 보면 ISTJ(이성적, 계획형) 같은 사람이 될는지도 모른다. (물론 방심은 금물!)



동생의 깜빡에, 그리고 뭇 타인의 자그마한 덤벙에 묘하게 눈이 간다. 가벼운 덤벙은 반갑고 무거운 덤벙은 안쓰럽다. 남 일 같지 않아 이렇게 외치곤 한다.

그럴 수도 있지!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려나?)


그래도 나의 덤벙 조각들을 함께 나눠 가진 그들의 대사가 ", 맞다;;" 에서 "오, 찾았다!!"로 바뀌는 날들이 많기를. 그들이 주로 듣는 대사가, "또 뭔데? 뭘 놓고 온 건데?"에서 "찾았다니 다행이네." 같은 것들로 변했으면 좋겠다.



타인의 덤벙은 내 과거이자 현재이고 어쩌면 미래이다. 우리는 서로를 관찰하며 조금씩 덤벙의 허물을 녹여 나가고 있는 중인지도.


덤벙이들, 오늘도 빠듯한 이 세상 살아내느라 수고했어요. 주말엔 맘껏 뒹굴뒹굴 <덤벙덤벙>하여 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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