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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책장봄먼지 Aug 10. 2024

품질이 우수한 덤벙도 있습니다만

또다시 아파트 소방벨이 울린다. 우리 가족은 주섬주섬 무언가를 챙긴다. 

-뭐야? 또야?

미심쩍어하면서도 가방을 메고 양말을 제법 느긋이 챙겨 신는다. 이번에도 한 번 더 속는 셈 친다.

-뭐야? 우리밖에 안 나왔어. 

쩌렁쩌렁 울리는데도 다른 집들은 묵묵부답이다. 이 검은 새벽에 우리 가족 셋만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오작동이에요, 오작동.

지나가던 관리실 당직 직원의 말씀이다. 


우리는 이사 온 후 대체 몇 번의 오작동이냐며 다시 집으로 들어간다. 시간은 새벽 1시. 이 시간에 뭐 하는 건가 싶지만 기왕 잠에 깬 김에 뜨듯한 물을 한 잔씩 마시고 잠시 담소를 나눈다.


-참, 엄마. 근육 경련은 좀 괜찮아?

사실 그간 며칠째 엄마의 입가 경련이 계속되었던 터라 그날은 신경외과를 다녀왔었다.

-계속 경련이 나.

-아까 신경외과를 다녀와서 약까지 먹었는데도 어떻게 잘 안 멈추네...

나는 심히 걱정된 표정으로 엄마를 바라본다.


-내가? 신경외과를 갔었다고?

-응? 아니 아까 낮에 나랑 신경외과 가서 오래 기다렸잖아. 한참 기다렸다 진료받고 약 처방받고, 그 약 먹고 운전하면 안 된다 그랬고.

-우리가? 언제?


등줄기가 갑자기 서늘하다. 엄마는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엄마, 오늘 손자네 갔던 거는 기억나? 현이네 갔던 거는?

-우리가? 오늘?

이번엔 등줄기가 서늘한 게 아니고 눈앞이 캄캄하다. 

-기억 안.. 나?

침을 꼴깍 삼킨다.


일흔 넘고 여든 넘으신 부모님과 살고 있는 다 늙은 딸내미인 나는 급히 긴장 모드로 들어선다.

-엄마, 엄마 생일이 언제야?

-칠 월.

그럼 내 생일은 언제야? 우리 현관 비밀번호는? 여기 언제 이사 왔어? 나의 질문 공세가 계속된다.


-엄마, 방금 우리 셋이서 기기 오작동 때문에 밖에 나갔다 온 거는 기억나?

-우리가? 언제?

-이십 분 전쯤에 나갔다 왔었어.


나는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든다. 심장이 조급히 나댄다. 하지만 나는 찬찬히 사태를 다시 분석해 본다. 아무 시그널도 없이 이렇게 갑자기 모든 기억이 혼재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말이 안 되므로 나는 평소 내 성격과는 다르게 차분해지기로 한다. 엄마를 똑바로 바라본다. 

-엄마, 따뜻한 물 한 잔 더 마셔 봐.


옆에서 아버지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으신 눈치다. 그래, 지금은 내가 정신을 차려야 한다. 정신을, 정신을... 잠깐! 오늘 약! 운전하지 말라던 그 약, 그 종이봉투가 어디 있지?


처방전을 찾아 약의 이름을 인터넷에 검색해 본다. 부작용도 함께 찾아본다. 

<이 약이 사람에 따라 어떨지는 모르지만 난 이 약 먹고 밤에 친구들이랑 신나게 놀았는데... 다음 날 기억이 안 남. 분명 사진도 찍고 동영상도 있는데 나는 내가 한 일이 기억 안 남.>


어느 카페 글을 보고 가슴을 쓸어내린다. 분명 그 약 때문일 거다!


-엄마, 아무래도 약 때문에 기억이 안 났던 건가 봐.

-약?

일단 원인을 찾았다는 생각으로 엄마와 아빠를 안심시킨다. 약의 부작용에 대해 알려 드린 후 사태를 이리저리 살핀다. 거실에서 안방으로 거처를 옮긴 후 엄마의 손발을 문지르고 몸을 녹여 드린다.


이번엔 아버지가 묻는다.

-아까 우리 축구 이겼어, 졌어?

-몇 대 몇으로 우리가 이겼잖아.


어라, 아주 정확하다. 오늘 신경외과 다녀온 거는? 너랑 갔었잖아. 그럼 아까 오작동 소방벨 울려서 나갔다 온 온 거는? 기억나. 엄마만 양말 안 신고 나가서 엄마가 밖에서 나 붙들고 양말 신었던 거는? 그건.. 잘 모르겠네? 됐어, 천천히 기억하면 돼. 





그 사건 후 10개월이 지났다. 

우리 엄마는 그 후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이곳저곳에서 영민함을 발휘하고 계시며, 최근에는 아버지를 따라 치매안심센터에 가서 검사를 해 보셨는데 아주아주 정상이라는 소견까지 들으셨다. (아버지는 운전면허증을 갱신하려면 해당 진단서가 필요하다고 한다.) 물론 아주아주 정상이지만 아주 가끔은...?


-엄마, 부침개 올려놨었어?!!!

-아, 맞다.

-엄마, 화장실 불 또 안 껐는데?

-아, 맞다.


평생 너무나도 완벽하고 무척이나 정확하기만 하던 우리 엄마가 가끔은 나처럼 '아 맞다'를 간혹 외치신다. 하지만 '엄마의 덤벙'이 나는 사랑스럽기만 하다. 귀엽기만 하다. 그저 '아, 맞다' 외치며 나를 향해 웃어 주시는 덤벙이라면!



어떤 덤벙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사랑스럽다.

어떤 덤벙은 아주 아주 품질이 우수하여 그저 곁에 꼭 붙들어 두고 싶은 덤벙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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