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일지 01

할 일이 있다는 것

by 봄책장봄먼지

할 일이 있다. 그 사실이 나를 안심하게 만든다. (한때는 이 말이 나를 혼돈 혹은 한숨으로 몰아넣을 때가 있었다.) 지금은 어설프고 서툰 편집자지만 글자가 종이를 타고 책이 되어 가는 과정을 조금씩 목격하고 있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그 현장의 주체적인 목격자가 되고 싶은 것이 지금의 소망이다.


일어나면 교정지를 먼저 찾는다. 2쪽 내지는 4쪽 모아 찍기로 뽑아 둔 원고도 있고, 용지 크기에 맞게 1쪽 찍기로 크게 뽑아 놓은 원고도 있다. 글자가 커서 오히려 더 불편함이 느껴지는 그 원고는 사실 우리 아버지의 원고다.

6~7년 전, 아버지 책 100권을, ISBN 같은 바코드 없이 동네 인쇄소에서 인쇄했다. 이제 그 책에 세상의 이름을 붙여 드리고 싶다. 하지만 돈 되는 할 일에 밀려 돈 안 되는, 적어도 내게는 돈이 안 되는 책이라는 이유로 그 책은 내게서 밀려나고 물러나기를 반복한다. (아버지 책을 뒤로 밀어 버리는 것이 나인지 돈인지 세상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출판사가 급하게 여기는 다른 원고를 살짝 제쳐 두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내 아버지부터 손에 쥐어 본다. 우선 ‘그 여름, 기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이라는 책의 제목부터 바꾼다. 두서없이 작품 위주로 나열한 기존의 구성도 바꾼다. ‘노년’을 주제로 ‘나이 들어감, 회한, 건강’ 따위의 내용이 담긴 작품들을 ‘세월’이라는 소주제로 묶어 1장으로 일단 분류한다.

2장은, 아버지가 새로 쓰신 작품들이 있어 이를 전면에 배치하기로 한다. 1장의 ‘세월’이라는 주제에서 더 나아가 ‘노부부의 삶’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묶을 생각이다. (이 이야기엔 시집 안 간 나 같은 늙은 딸내미와 시집간 조금 덜 늙은 딸내미의 이야기도 나온다.) 물론 '노부부'의 주제에 딱 들어맞는 내용만 있는 것은 아니라서 1장과 2장의 작품 수가 균일할지는 미지수다.

3장은 ‘고향’을 주제로 묶는다. 남쪽 섬에서 나고 자란 내 아비, 내 아버지는 섬과 바다를 기억하며 여든 가까이 살아왔다. 태어난 시간과 유년의 기억이란 실로 대단한 힘을 가진 것이라서 내 아버지는 누가 어떤 질문을 하든 고향에 관한 이야기라면 막힘이 없고 주저함이 없다. 아마, 편집자의 시선으로 봤을 때 가장 영근 시들이 이 부분에 몰려 있지 않을까 싶다.

4장은 '고독, 허무'를 주제로 잡았다. 다소 비슷한 시상들이 묶여 있어 손봐야 할 부분이 많다. 쳐낼 것은 깔끔히 쳐내자고 작가님인 내 아버지 김원◯ 씨에게 강력히 건의할 생각이다. (아버지의 단 하나뿐인 편집자의 자격으로 나는 김원◯ 작가님을 좀 함부로 대하는 편이다.)



독립출판물이 유행도 하기 전에 독립출판물 형식으로 아버지 책이 나왔을 때, 나는 아버지의 책을 그 나름 교정하고 교열해 보았다. 그러나 지금 보니 틀린 글자, 이상한 띄어쓰기가 많다. 남부끄러워 어디 가서 내가 손봤다고 말도 못 할 지경이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눈에 뜨여 감사하다. 적어도 내가 그간 헛짓을 했던 건 아니라는 뜻이니까.

작년 1년, 퇴사 후 난데없이 편집자 공부를 하며 아는 분 출판사에서 하나뿐인 프리랜서 편집자로 일을 한다. 기존 출판사 경력도 전무하므로 ‘이게 맞는지’를 몰라 ‘저게 안 맞으면 이게 맞는 거겠지’ 이리 대략 추측을 하며 어설픈 걸음으로 늦깎이 편집자 길을 걷는다. 누가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물으면 글자 뜯어고치는 사람이라고만 말한다. 나의 편집 실력은, '왕초보운전, 죄송합니다, 먼저 가세요.'라고 등판에 붙여야 할 형편이다.



그래도 아직 할 일이 많다. 그리고 입에 풀칠을 한다.

입에 풀칠 할 정도로만 돈을 벌기 시작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내가 하고 싶은 일로 먹고살기 시작했음에 감사를 드린다. 그 감사는 2019년 한 해, 반백수 1년 시절을 아무 소리 없이 같이 견뎌 준 내 아버지에게도 응당 돌아가야 할 감사이기에, 나는 오늘 게으른 딸을 잠시 탈피하여 아버지의 원고를 한 장 한 장 넘긴다. 잘 정돈해서 내가 속한 출판사에 내 아버지 책을 투고해 볼 생각이다.



언젠가는 내 아버지가 출간할 책의 판권 페이지에 ‘책임편집 김◯민’이라 적힐 날을 손꼽아 기다려 본다. 나에겐 아직 할 일이 있다.


그리고 그 일 한가운데 내 아버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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