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일지 12

돌고 돌아 제자리지만

by 봄책장봄먼지

“이거, 내 보자.”


출판사가 배본 업체를 처음 계약하던 작년 5월, 파주에서 대표님을 만났다. 대표님 첫 책 마무리 8개월 후, 개인적으로는 퇴사 5개월 후였다. 본격적으로 출판사 일을 시작하기 전이었다.

“요새 뭐 하노?”

“요새 저 이런 거 만들고 놀아요.”


난 지난 3월 고래사진관 수업에서 만든 나만의 독립출판물을 대표님께 자랑했다. (그즈음 난 내가 인디자인으로 직접 작업한 책이라는 생각에, ‘쓸데없이 뿌듯’해하며 늘 내 책을 가지고 다녔다.) 허접해 보이지만 겉모습은 책 같았다. 아니 내겐 책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우리 대표님,


“우리 출판사 두 번째 책으로 이거 한번 내 보자. 내가 내 줄게.”

“(허헉) 정말요? 아니 안 그러셔도 되는데…….”

“싫어서 그러노?”

“아뇨. 그건 아니고, 저야 뭐, 완전 감사하죠.”


어영부영 얼렁뚱땅 구두 계약(?) 비슷한 말이 오갔고 우리는 점심을 먹은 뒤 배본사 팀장님을 기다렸다. 대표님과 내가 약속 시간이 다 되어 담당자를 만나러 들어갔을 때, 대표님과 같이 구미에서 올라오신 한 지인분이 미팅 시간 동안 우리를 기다리시면서 내 독립출판물을 구경하셨다.

내 생애 첫 독립출판물이, '독립'이라는 기지개를 켜며 '만세'를 외치기도 전에 기성 출판계에 이렇게 발을 들이미는 것인가. 얼떨떨 기쁘기도 했고, 조금은 기분이 이상하기도 했으며, 아주 조금 뭔가 허전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날 밤 대표님께서 오늘 파주까지 오느라 수고했다며 전화를 주셨다. 그러면서 내 책을 읽은 지인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셨다고 했다. 내 독립출판물을 읽으며 표현력이 참 좋다고 느꼈다고, 그런데 퇴사 이야기라 내용 자체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과연 많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내 책을 읽어 보지도 않고 내 글쓰기 재간을 믿어 주시는 대표님이시기에 그래도 한번 수정 및 보강을 해서 책 한번 만들어 보자고 내게 응원을 해 주셨다. 내 책을 읽어 보지도 않고 무작정 내 글을 믿으시는 대표님.. 감사했다.


대표님은, 내가 직접 쓴 글로 하나부터 열까지 스스로 책을 만들어 보면서 출판 과정을 온전히 겪게 해 주고 싶으시다고, 출판을 체감해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듯하다고 격려해 주셨다. 아직 출판사 편집자 일을 시작하기 전이었으니 이런 제안은 선물 같은 일이었다.


그런데 며칠 뒤, 스승의 날 즈음하여 대표님이 지인분들과 미국 여행을 떠나셨다. 인천공항이 많이 멀지는 않아서 얼굴 한번 보자시는 대표님께 배웅 겸 달려갔다. 그날 나는 대표님께 우리의 구두계약을 마무리할 최종 발언을 꺼낼 심산이었다. 무언가 확실히 해 놓아야 할 필요를 느꼈다.


"대표님, 저, 제 책이요. 저희 출판사에서 안 내려고요."

어렵게 꺼낸 이야기에 대표님도 어리둥절. 기분 좋은 여행을 앞두고 이 예비 편집자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으셨을지도 모른다. 폭탄발언에 가까웠다. 호의를 감사하게 받는 게 어른께, 그리고 상사에게 갖춰야 할 예의라면 예의일 터. 그러나 나는 어른의 호의를 정중히, 매끄럽지는 못했으나 최대한 정중히 거절했다.

"응? 그게 무슨 말인겨? 왜 출간을 안 한다는 겨?"

"그게 저, 그러니까. 웅얼웅얼. 꽁알꽁알. 어쩌고 어쩌고."

"응? 자세히 말해 봐. 나, 확실한 거 좋아한당."


"독립출판물을 내고 할 수 있는 모든 경험들을 이 한 번의 기회로 바꾸는 게 좀 그래서요."


대표님께 어렵게 진심을 꺼냈다. 난 내 책들을 가방에 둘러메고 내 책을 받아 주겠다는 독립책방들을 내 발품을 들여 찾아다니고 싶었다 어색한 미소로 음료수라도 전하며 감사의 뜻을 수줍게 조아리며.. 책방 주인장님들께, 내 책을 찾아 줄 극소수(아주 극소수일 테지)의 독자분들께 내 얼굴을(내 얼굴 같은 책을) 들이밀고 싶었다.


내 입고 메일은 이런저런 이유로 책방들에게 거절을 당할 것이고, 어쩌다 한 군데쯤 날 받아 주겠다고 하면 난 빛의 속도로 그 책방을 향해 날아갈 것이다. 내가 직접 제작비를 지불해야 하므로 책을 팔아 돈이 들어오는 일보다는 책을 파라기 위해 돈을 내보내는 일이 더 많을 것이다.


그래도.. 그래도 내 손을 들여, 내 손버릇을 들여 종이를 고르고 글자를 고르고 제목을 만들고 온통 나로 가득 찬 판권 페이지를 만들고 싶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인 책을, 나를 뜯어고치지 않아도 되는 온전한 나 그 자체를 만나고 싶었다.


"그거 낭만적인 소리인 거 알지?"


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러나 나는 내 글을 내 마음대로 하고 싶고 내 경험을 내 마음대로 하고 싶다. 내 경험을 돈에 팔아버리고 싶지 않은 이 이상한 마음. 잘한 결정일까. 정말 낭만적인 생각일까. 아직 퇴직금이 남아 있던 시기라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10개월 후...



애고애고. 내 책은 아직도 안 나왔다. 정성도 돈도 모자라 '아직도'다.

그때 대표님이 덜컥 손잡아 주실 때 냉큼 네네네, 하면서 출간을 할 걸 그랬나?

머리만 괜히 긁적여 본다.



그러나 그때로 다시 돌아가서,

"진짜 책 안 낼 거가? 낼 거가, 안 낼 거가?"

이런 질문을 다시 듣는다 해도,


"안 낼게요, 대표님. 제안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똑같은 결정을 하지 않을까.


책의 운명은 아무도 모른다. 태어날지 배 속에만 있을지, 만약 태어난다면 과연 언제 태어날지. 대체 어떤 이의 손에 안길지, 혹은 안길지 못 안길지.. 아직 제정신을 못 차리고 세상 무서운 줄도 모르고 '독립'의 '낭만'에만, '독립출판물'의 낭만에만 젖어 있는,


나는 천생 '독립낭만주의자'다.


내가 직접 내 책의 작가로, 편집자로, 디자이너로, 유통업자로, 출판사 대표로 살고 싶다. 마지막 낭만까지 버리고 싶진 않다. 다른 낭만 다 잊거나 잃는다 해도 이 '독립낭만'의 유흥과 여운만은 꼭 끝까지 지닌 채 살고 싶다.



난 어쩔 수 없는 '독립낭만주의자'이자 '낭만 편집자'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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