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일지 14

소심한 늦깎이 편집자

by 봄책장봄먼지

"이번 기수는 사람들이 다 착해. 순진해. 그걸 수업 첫날 바로 알았지."

지난여름, 무더위가 턱까지 차올라 내 정신이 간당간당 겨우 숨만 붙어 있던 그때. 신촌 한겨레교육문화센터에서 8주간 편집자교육과정을 들었다. 그 수업 개강회식 때 담당 선생님 가운데 한 분이 위와 같은 말씀을 하셨다.


“나이를 만으로 얘기를 안 하더라고. 다들 착하더라고.”

웃으며 이런 말도 덧보태셨다. 우리는 출판편집학교의 62기 수강생들이었고 선생님 말씀대로 솔직하고 착해서인지 서로 피해 주는 일 없이 조용조용 지내곤 했다. 나는 스물몇 명의 사람 가운데 가장 연장자였다. 대학을 갓 입학했거나 사회에 갓 나왔을 법한 새파란 친구들과 함께 수업을 들었는데 ‘배우기에 늦은 나이란 없다’라는 주문을 스스로 걸기에도 약간 겸연쩍은 나이였다. (박명수 씨의 명언이 떠오른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는 정말 늦은 거’)


하지만 원고 검토서나 신간 기획안을 그룹별로 모여 평가를 할 땐 솔직한 장점을 제대로 드러내며 서로의 기획안이 어떤 강점 및 약점을 지녔는지 날카롭게 비판하기도 했다. 나는 웬만하면 남에게 해가 되는 말을, 아무리 필요하다고 해도, 내가 뭔데 감히, 라는 생각이 들어서 조심스럽게 칭찬과 비평의 경계를 아슬아슬 넘나들며 선을 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이런 나 역시도,


“그런데 도서관에 가 보면 에세이 쪽에서 이런 직업군에서 쓴 책이 많더라고요. 이 책을 집어서 보다가 작가 소개를 봤더니 그 직업, 저 책을 집었는데도 그 직업…….”


그런데 갑자기 좌중이 내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웃음보를 잔잔하고도 조금 길게 터트렸다. 앗. 이게 아닌데. 비난하려던 게 아닌데.


“이런저런 의견들이 나왔는데 작가군을 바꿀 의향은 없어요?”

선생님이 그 발표 당사자에게 묻자,

“아니요. 없는데요.”

그 발표자(수강생)는 단호했다.


하아. 뒤늦게 현실자각타임이 들이닥쳤다. 수강생 가운데 나이도 가장 많고 평소 혼자 어슬렁어슬렁, 누구와 어울려 다니지도 않던 ‘아싸’에 가까운, 늙은 언니, 혹은 아줌니의 비판. 내가 당사자 입장이었으면 어땠을까.


소심하기 짝이 없고 소심(小心)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소심쟁이인 나. 나는 그 후 일주일을, 혼자 미안해했다. 사과하기에도 웃긴 일이었고 그럴 사이도, 그럴 문제도 아니었다.


이건 편집자 자격의 문제일까, 토론에 미숙한 사회성 문제일까. 소심쟁이만의 기우일까. 며칠을 이불킥하던 그때가 불현듯 떠오른다.



벌써 반년도 훨씬 넘은 과거. 그 이십 대 중반의 어린 예비편집자는 지금쯤 어디에 자리를 잡았을까. 자기 자리를 찾았을까? 그때 그 늙은 언니의 비평을 잘 떨치고 살아가고 있을까.


본의 아니게 상처를 주었을 그녀에게 뒤늦게 한마디를 전하고 싶다. 그녀, 꼭 자신이 기획한 신간이, 실제 현장에서는 넉넉한 오케이와 푸근한 기대를 받기를, 누군가의 돌에 옆머리를 스치듯 맞아도, 흥, 칫, 뿡, 하면서 쉽게 털어내기를……. 누가 던진 돌이든 그 돌의 옥석을 잘 골라내기를.



나 역시 내게 날아든 돌들을 잘 가려내는 편집자가 되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편집자를 꿈꾸는 모든 예비편집자의 '옥석 가리기 재능'이 빛을 발하기를,


나 혼자 이쪽 구석에서 저쪽 편집자들을 가만히 응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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