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 불교, 타로카드 운명의 수레바퀴

겨울2. 취향이 곧 인생이다.

by 봄플

겨울은 멈춤의 계절이다. 학생들은 한 해 동안 쌓인 지식을 정리하고, 직장인들은 밀려 있던 연차를 소진하며 송년회와 신년회 사이를 오간다. 이 계절은 단순한 휴식을 넘어, 한 해를 정리하고 새해를 준비하는 과정 속에서 그동안 옆으로 밀어두었던 ‘나’를 마주하게 만드는 시간이다. 음악을 곱씹고 상처를 온전히 받아들일 때, 비로소 진정한 성장이 시작된다.


불교에서 겨울은 매서운 추위를 견디며 매화가 꽃을 틔우는 계절로, 인내와 깨달음을 준비하는 시간으로 읽힌다. 동작과 생각, 욕망을 잠시 멈추고, 그 멈춤 속에서 평상심을 가다듬는 것을 중시하는 것이다. 겨울의 휴식은 그냥 쉬어 버리는 시간이 아니라, 새해를 여여(如如)하게 맞이하기 위한 준비이자, 업(業)의 연기 속에서 ‘나’를 다시 구성하는 사유의 자리다.

여여는 산스크리트어 타타타(Tathatā)의 번역으로, ‘있는 그대로의 그러함(so let it be)’, 곧 진리의 세계 자체를 가리킨다. 차별과 분별, 변화에 휘둘리지 않고 사물을 그 자체로 보는 경지이며, 금강경에서 말하는 여여부동(如如不動)처럼, 일상의 파고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머무는 마음의 상태를 뜻한다.


노트

한 해를 정리하려 지난해 마지막 페이지를 펼치면 낯설기만 하다. 몇 달 전 내가 쓴 글이 지금의 생각과는 다르게 느껴진다. 이 길을 계속 가야 할지, 아니면 다른 방향을 찾아야 할지, 산에서 갈라지는 오솔길 앞에 선 것처럼 영영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순간처럼 느껴진다. 중구난방으로 적어 둔 작은 종잇장이 이렇게나 중대한 결정을 좌우해도 되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쌓아 온 것이 있으니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고, 세상은 급격히 변하고 있어 다른 시도를 하지 않을 수도 없다. 새로운 길을 택하자니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두려움과 막막함이 앞서고, 기존의 길을 계속 가자니 이미 문제와 균열이 눈에 들어와 지루함과 갑갑함이 밀려온다. 노트를 괜히 펼쳤나 싶어 덮어 두고 명상을 하면 한동안 마음은 가라앉지만, 시간이 지나면 걱정은 다시 고개를 든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은 하루가 너무 소중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막상, 그렇게 소중한 하루를 이렇게 흘려보내도 되는가 하는 물음이 남는다.


불교 사상에서 이런 연말의 노트 복습은 업(業)의 연기(緣起)를 직관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과거의 기록이 현재의 ‘나’를 만들어 낸 조건적 산물임을 알아차리고, 여여한 평정 속에서 선택을 잠시 내려놓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 업의 연기는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도 멸한다(此有故彼有)”는 말처럼, 모든 존재와 사건이 서로 기대어 일어나는 상호인연생기를 가리킨다.


선업은 선한 과보를, 악업은 악한 과보를 불러들여 현생의 오온(五蘊)을 형성하지만, 동시에 무아의 통찰을 통해 실체적 자아를 부정함으로써, 현재의 행위를 통해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연다.

갈라지는 길 앞의 두려움은 무상(無常)과 무아(無我)를 떠올리게 한다. 집착의 무상성이란, 본래 덧없는 대상들(색·수·상·행·식)을 영구한 자아로 착각할 때 생겨나는 번뇌를 말한다. 모든 것은 연기에 따라 생멸하니, ‘잡지 말라’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지루함 또한 업의 과보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음을 알리는, 일종의 ‘이 길은 아니다’라는 신호일 수 있다. 기존 업에 대한 집착이 서서히 소멸하며, 새로운 인연으로 나아갈 여지가 열린다는 뜻이다. 이 신호를 무시하면 또다시 집착이 켜켜이 쌓인다. 명상으로 그 감각을 관찰할 수 있다면, 여여한 평정 속에서 보다 자연스러운 선택이 서서히 떠오를지도 모른다.


하루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애써 꿈이나 다른 방향을 떠올리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 태도 또한 충분히 일리 있는 삶의 방식이다. 굳이 이런저런 계획을 펼쳐 놓아 스스로를 복잡하게 만들기보다는, 가족과 나의 오늘 하루의 행복을 생각하며 성실히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만한 삶일 수 있다. 장기적인 미래에 대한 걱정을 애초에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을 수도 있다. 그런 생각 자체를 부질없다 여기며, 다만 주어진 하루를 충실히 통과해 나가는 것이다. 단지 두려움을 떨쳐내고 지금 이 삶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것은 누구보다도 옳은 선택일지 모른다.

불교의 팔정도(八正道)는 이러한 일상의 삶 자체를 수행의 자리로 보는 지혜를 담고 있다. 정견, 정사(정정진의 앞 단계로서의 올바른 의도),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으로 이루어진 여덟 가지 바른 길은, 쾌락 추구와 자기 학대라는 두 극단을 피하는 중도(中道)의 실천이다. 여기서 ‘정(正)’은 도덕적 잣대의 강요라기보다, 무명과 탐·진·치의 극단에서 벗어나 균형을 회복하려는 방향성을 뜻하며, 그 흐름이 열반을 향해 우리를 조금씩 이끈다. 일상의 말과 생각, 일과 관계 맺기가 곧 수행이라는 이 가르침은, 어디 특별한 깨달음을 찾아 떠나지 않아도 지금의 삶 한가운데서 이미 길 위에 서 있다는 조용한 위안을 건넨다.


[팔정도(八正道)]
정견(正見): 사성제와 연기법을 올바르게 보는 견해
정사(正思): 집착과 해탈을 바르게 사유하는 마음
정어(正語): 거짓·악담 없는 바른 언어
정업(正業): 살생·도둑·음행 없는 바른 행위
정명(正命): 해로운 직업 피하는 올바른 생계
정정진(正精進): 악을 끊고 선을 증진하는 노력
정념(正念): 몸·감각·마음·법을 깨달아 있는 기억
정정(正定): 마음을 집중하는 선정 상태


숙제

삶은 어쩌면 별것 아닐 수도 있다. 취향이 곧 인생이 되고, 그저 밥을 먹고 차를 마시는 일이 삶의 전부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대학을 나와 어떤 직책을 맡든, 스님이 되거나 예술가가 되든, 어느 동네의 어떤 아파트에 살든, 돈의 가치에 따른 시선의 차이는 늘 우리가 지니고 다닐 숙제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숙제를 내려놓을 때 비로 행복이 보인다. 다행히 현재의 시스템이 자신의 성향과 잘 맞아, 생각한 대로 살아갈 수 있다면 더 말할 나위 없겠지만, 그것이 정말 끝까지 안고 가야 할 숙제인지, 아니면 이제는 두고 떠나야 할 숙제인지는 한 번쯤 물어볼 필요가 있다. 평생 이고 지고 바라며 살 것이라면, 어쩌면 애초에 그것을 내려놓고 다른 방식의 행복을 찾는 쪽이 더 진정한 방향일지도 모른다.


업의 고통은 타로 카드의 운명의 수레바퀴(Wheel of Fortune)를 떠올리게 한다.

카드 중앙의 바퀴는 인생의 주기적 변화를 표현한다. 꼭대기에는 행운이, 바닥에는 불운이 자리하지만, 바퀴는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회전한다. 네 모서리에 그려진 네 가지 존재는 황소, 사자, 독수리, 천사로, 황소자리·사자자리·전갈자리·물병자리에 해당하는 네 고정궁과 네 원소를 상징하며,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도 유지되는 어떤 균형과 지혜를 암시한다.

정방향의 운명의 수레바퀴는 통제하기 어려운 차원의 긍정적 변화, 행운의 전환, 새로운 기회의 등장을 암시한다. 상황이 자연스럽게 굴러가며 성장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메시지를 건네는 동시에, 불교의 업 사상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변화의 흐름 속에서도 태도를 통해 균형을 찾고 성장해 갈 수 있음을 일깨워 준다.

겨울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노트를 덮고, 조용히 차를 한 잔 따른다. 오늘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만큼, 단 하루만이라도 집착을 내려놓고 여여하게, 그저 흘러가는 하루를 지켜본다. 그것이 어쩌면 이 겨울이 우리에게 건네는 가장 큰 선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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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 플레이리스트 바로가기 (매주 화목토 오전 10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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