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아웃, 사르트르, 타로카드 나인소드

겨울3. 타인은 지옥이다.

by 봄플

차가운 겨울 밤, 우리는 휴대폰을 좀처럼 내려놓지 못한다. 타인은 어떤 의미일까. 타인은 따뜻한 사람일까, 차가운 사람일까. 사람에게 매달리듯, 우리는 때로 휴대폰에 매달린다.

수많은 이별을 겪고도 사람에게 상처받았으면 또 다른 사람으로 잊혀져야 한다고들 말한다. 그 수많은 사람을 보내고도 다시 사람에게 의존하려는 마음은 회귀 본능일까, 아니면 우리를 더 불안하게 만드는 또 다른 위험 요소일까. 사람은 무언가에 매달리는 순간 신앙심으로 자신을 채우고, 정당성을 주장하며, 논리처럼 보이는 오류 속에서 고통받곤 한다. 그 신앙의 대상은 회사가 될 수도, 애인이 될 수도, 휴대폰이 될 수도 있다.


사르트르는 “지옥은 타인이다”라는 문장으로 관계 속에서 경험하는 소외와 갈등을 포착했다. 그러나 그에게서 불안의 근원은 타인 자체가 아니라, 타인의 시선 속에서 드러나는 나 자신의 자유를 자각하는 데 있다. 타인(연인, 가족, 동료)의 시선(le regard d’autrui)은 나를 하나의 대상으로 고정시키고, 그 시선에 사로잡힌 나는 불편함과 수치, 분노를 느낀다. 그러나 이 불편함은 단지 타인이 나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시선 앞에서 나의 자유를 여전히 선택해야만 하는 순간이 드러나기 때문일 것이다. 진정한 불안은 결국 이 자유를 정면으로 직면할 때 드러난다.

사회나 회사는 불안을 유발하는 하나의 ‘배경’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사르트르는 이를 우리의 자유를 가리는 ‘자기기만(mauvaise foi, bad faith)’의 도구로 보았다. 예를 들어 직장 규범이나 사회적 압력을 핑계 삼아 자유로운 선택을 미루면, 불안은 잠시 옅어지는 듯 보이지만, 결국 다시 자유를 직면하는 순간 불안은 되살아난다.


사르트르에게 불안은 자유의 필연적 동반자이기에 완전히 제거할 수 없다. 자유로운 한, 우리는 불안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다. 중요한 것은 불안의 유무가 아니라, 그 불안을 정면으로 인정하고 책임을 떠안으면서, 보다 진정성(authenticité) 있는 선택 쪽으로 나아가려는 태도다. 불안을 부정하거나 외부(사회, 타인)의 탓으로 돌리는 ‘자기기만(mauvaise foi)’을 피하고, 자신의 선택이 세상에 어떤 결과를 남기는지 자각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휴대폰에서 잠시 로그아웃해 나를 살피고, 모든 선택을 타인 탓으로만 돌리지 않으려 조용히 성찰하며, 예술 감상이나 글쓰기를 통해 스스로의 선택을 연습해 보는 일은 그런 의미에서 작은 실천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자유를 선택한 뒤 마주하는 일시적인 경제적 어려움 또한, 불안의 또 다른 얼굴이 아닐까.


이미 한 번 사회가 요구하는 길을 따라갔다가 후회한 경험이 있다면, 부족하더라도 이번만은 자신의 선택을 업으로 삼겠다고 마음먹을 때 오히려 한결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다.

그럼에도 명함첩 속 동문들의 이름 옆에 상무, 교수, 팀장 같은 직함이 단단히 자리 잡은 것을 보면, 그들의 모든 사정을 알 수 없음에도, 나 역시 그 자리에 있었을 수 있다고, 그 자리가 내게도 어울렸을 것이라고 또다시 착각하게 된다. 사회가 원하는 자리를 한 번 더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수십 년 동안 비슷한 길을 걸어온 것을 후회하면서도, 때때로 뒤를 돌아보게 되는 마음은 어쩔 수 없는 인간적인 감정처럼 느껴진다.

양로원에서는 요양보호사가 끊임없이 노인분들에게 거짓말을 건넨다고 한다. “자식들이 곧 올 거예요”, “다섯 밤만 자면 집에 가실 수 있어요”, “차량이 고장 나서 오늘은 지인이 못 오신대요”, “신체적인 이유보다 상황이 어쩔 수 없었던 거잖아요” 같은 말들이다. 이런 말을 듣고 있으면, 내가 선택한 길이 과연 나와 내 가족을 끝까지 지탱해 줄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마음 한편을 흔든다.

인터넷 서점에는 매일같이 수십 권의 새 책이 쏟아지고, 유튜브에는 끝없이 새로운 콘텐츠가 올라온다. 부익부 빈익빈이 심해지면서, 몇몇 대형 기업을 제외한 많은 회사가 문을 닫고, 개인의 경쟁은 점점 더 치열해진다. 이런 풍경 속에서 지금 내가 선택한 길이 과연 옳은 방향인지 자꾸만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스스로 선택한 길임에도, 나는 여전히 신입사원처럼 벌벌 떨고 있다. 아니, 어쩌면 신입사원 쪽이 더 귀족일지도 모른다. 그들에게는 사수가 있고, 정해진 월급이 따박따박 들어오기 때문이다.


사르트르는 돈을 벌지 못하는 불안 역시 근본적으로는 자신의 자유와 선택의 책임을 자각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보았다고 정리할 수 있다. 이때 ‘돈이 없다’, ‘사회가 이렇게 만든다’는 식으로 원인을 외부에만 두고 싶어질 때, 그는 그것을 자유를 가리는 ‘자기기만(mauvaise foi)’의 한 형태로 읽는다. 재정적 불안은 “돈=안정”이라는 사회적 가치를 절대화해, 자유를 유보하고 선택을 미루는 핑계가 되기 쉽지만, 사르트르에게 진정한 불안은 결국 “내 선택으로 어떤 삶을 만들어 갈 것인가”라는 실존적 물음 그 자체다.

명함첩 속 동문들의 이름 옆에 상무·교수·팀장 같은 직함이 차곡차곡 자리 잡은 것을 보며, “나도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었는데”라고 느끼는 마음은, 하이데거가 말하는 세간(Das Man)의 규범에 휩쓸린 비본래적 태도와 닮아 있다. 세간(Das Man)은 “다들 그렇게 사니까 나도 그렇게 산다”는 식으로, 익명의 ‘남들’이 세워놓은 기준과 규범에 기대어 사는 방식이며, 이 안에서 우리는 자신의 고유한 존재 가능성을 외면한 채, 이미 짜인 성공 모델 속으로 스스로를 맞추려 한다. 사르트르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는 자유를 포기하고 사회가 강요한 성공 서사를 내면화함으로써, 불안을 잠시 덮어두지만, 결국 다시 자유를 직면하게 되는 순간 더 크게 불안이 터져 나온다.

양로원에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라는 말이 반복되는 장면은, 선택의 결과를 끝까지 직시하지 못한 태도를 비춘다. 나만의 업과 길이 과연 나와 가족을 지탱할 수 있을지 의심하는 마음은, 자유의 무게를 생생하게 체감하는 순간이며, 그 지점에서 다시 한 번 진정성을 가지고 재선택해야 하는 요구가 생겨난다.

불안을 단지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는 감정” 정도로 치부하기보다는, 하이데거가 말한 죽음의 유한성을 떠올리며 “이 선택으로 나는 어떤 존재가 되어 가고 있는가”를 되묻는 것이 필요하다. 자신의 길을 통해 사회적 가치를 새로 만들어 갈 때, 경제적·사회적 불안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그 한가운데서 다른 방식의 의미와 방향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이상하게도,

스스로 선택한 목적지를 향해 몸을 던져 움직일 때는 이런 불안이 의외 사그라든다.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사업을 준비하거나, 강의를 하며 나만의 길을 걸어가고자 할 때, 우리는 더 큰 자유를 느끼고, 어쩐지 치유받는 듯한 기분마저 든다. 불안은 잠시 멀어지고, 다시 용기의 불씨가 살아난다. 그 순간만큼은 타인이 나를 어떻게 볼지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가도 막상 불편해하는 세부 작업, 이를테면 영업을 잘 못하는데 영업을 해야 한다든지, 마케팅을 해야 한다든지, 특히 수익이 잘 나지 않을 때 우리는 다시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사르트르는 "자유는 불편함을 동반한다"고 하며, 불편함을 직면해 "이 작업으로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를 묻는 반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해결책으로 제시했다.

그래서 영업, 마케팅, 수익 부재 같은 불편한 현실을 단지 실패의 징후로만 보지 않고, 나라는 존재가 실현되어 가는 과정의 일부로 재정의해볼 필요가 있다. “이 작업이 나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 것인가?”, “이 과정을 통과한 뒤의 나는 어떤 결을 띠게 될 것인가?”라고 자문할 때, 우리는 그 일을 단순한 생존 기술이 아니라 자기 형성의 과정으로 의미화할 수 있고, 그만큼 자기 동기와 자유의 감각도 강화된다.

또한 사르트르는 두려움을 억누르기보다, “지금 나는 자유의 무게를 느끼고 있구나”라고 인정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본다. 명상, 글쓰기, 음악·미술 감상 같은 행위를 통해 감정을 표현하고 수용하며, 스스로와 대화하는 시간을 - 꾸준히 - 확보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중요하다. 이것은 불안을 없애기 위한 테크닉이라기보다, 불안을 자유의 징후로 받아들이는 훈련에 가깝다.

사르트르는 타인의 시선(le regard d’autrui)이 우리의 자유를 대상화하고 불편함을 불러일으킨다고 말하지만, 동시에 그 시선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자기만의 가치를 - 지속적으로- 반복해서 복기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 번의 결심이 아니라, 반복적인 자아 성찰이다. 단기적인 수익이나 결과에만 매달리기보다, 죽음의 유한성을 떠올리며 “이 선택을 이어가면 나는 어떤 존재로 남게 될까”, “내가 남기고 싶은 가치는 무엇인가”를 되묻는 것이 타인의 시선을 상대화하는 힘이 된다. 자신의 가치 기준이 또렷해질수록, 타인의 평가가 만들어 내는 불안은 조금씩 힘을 잃는다.

이제 잠시 모든 것에서 로그아웃해 보는 것은 어떨까. SNS·플랫폼·메신저·메일에서 한 달 정도 물러난 뒤, 노트 한 켠에 “이 자유로 어떤 가치를 창조할까?”라고 적어보자. 내 안에서 새로운 빛이 감도는 느낌을 맞이할 수 있을 듯하다. 단, 완전한 로그아웃은 일시적 도피가 아닌 진정성 있는 재선택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외부와의 단절이 ‘자기기만’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내면 반성을 통해 자유를 확인하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사르트르의 불안 개념은 타로 카드는 '9개의 검(Nine of Swords)' 카드를 닮았다.

‘9개의 검’은 한밤중에 잠에서 깨어 머리를 감싸 쥔 인물을 그려 놓은 카드로, 악몽, 죄책감, 자책 속에 갇힌 정신적 고통과 과도한 걱정을 상징한다. 삶의 무게로 인한 공포, 불면, 절망을 드러내지만, 동시에 검들이 실제로 인물을 찌르지 않고 벽에 걸려 있다는 점을 통해, 이 고통의 상당 부분이 마음이 만들어 낸 왜곡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아홉 개의 검은 어두운 벽에 나란히 매달려 있을 뿐, 카드 속 인물을 직접 해치지 않는다. 이는 두려움과 불안이 실제 현실의 위협이 아니라, 머릿속에서 증폭된 상상과 해석의 산물일 수 있음을 상징한다. 결국 이 카드는 정신적 고통과 걱정이 과장되거나 왜곡된 형태일 수 있음을 드러내며, 그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부터 이미 극복과 치유의 가능성이 열려 있음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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