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첫 어설픈 퇴사

by 봄플

몇 번의 퇴사가 있었지만, 이번 퇴사는 급하게 결정한 것이었다.

항상 이직할 곳을 마련해 두고 퇴사를 결정했었다. 그래서 더욱 며칠 동안 치열하게 생각하고 결정했다.

모든 물건을 천천히 가져오는 편인데, 이번엔 달랐다. 급작스러운 퇴사였던 만큼 몇 달 동안 쌓아둔 물건들이 너무 많았다. 먼저, 사무실에서 등받이, 방석, 장패드는 동료들에게 나눠주고, 약, 손목보호대, 펜 등 낡은 것들도 정리했다.

집에 들고 온 물품을 보니 파운데이션 2개, 선크림 2개, 칫솔 4개, 달걀 2개, 마우스 3개, 키보드 2개, 우산 5개로 모든 생필품이 두 배씩이 되어버렸다. 집에 돌아와서 쉴 법도 했는데, 계속 버리고 정리해야만 했다. 쌓아두기엔 양이 너무 많아 버려야만 고, 무선마우스의 USB 수신기 같은 작은 것들은 잊어버릴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급하게 결정된 만큼 급하게 나오게 되어, 회사 계정의 비밀번호 변경이나 기기 로그아웃 등 들키면 민망한 것들을 집에서 처리해야 했다.

쉬어야 하는 걸 안다. 여백이 있는 만큼 다시 써 내려가는 것도 안다. 누워도 있었지만, 자꾸 몸이 움직였다.

이렇게 나는 버려진 쓰레기처럼 있었고, 누가 치울 새도 없이 혼자서 제자리를 찾아가는 듯했다. 하지만 그만큼 더 확신이 들었다. 다행이다, 옳은 결정이었구나... 얼마나 상황이 좋지 않았으면 서로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되었을까 싶었다.

잘했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고, 그동안 고생했다는 위로가 따라왔지만, 미래를 생각하면 이내 곧 캄캄해졌다. 맞지 않는 곳은 정말 많았다. 그런데도 이렇게 급하게 정리하게 된 것은 아마 정말로 서로 간의 니즈가 맞지 않아서가 아닐까 싶다.


일주일

퇴사를 결정하고 실제 퇴사까지는 일주일의 시간이 있었다. 입사해서 처음으로 칼퇴를 안정적으로 했던 한 주였던 것 같다. 그동안은 글도 쓰지 못했고, 개인적인 시간도 남겨두지 못했었다.

퇴사를 했는데 다음 날이 토요일이라서 그런지 잘 와닿지가 않았다. 그다음 주는 여행을 가려고 했는데, 강릉은 가뭄이고 나머지 지역은 비 예보가 있었다. 다다음 주로 미루려고 했지만, 다음 주에 여행을 다녀오지 않으면 업무에 대한 여독을 풀지 못하고 정리하지 못할 것 같아서 급히 서울 내 워커힐을 예약했다. 예약했던 강릉은 가뭄 지역이어서 객실 예약 취소를 권장하는 편이라 다행히 취소할 수 있었다.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그토록 야근하고 출장하며 택시에서 생각했던 회사 밖의 안전한 이별. 그토록 바라던 소원이 이뤄졌는데도 패배감과 배신감이 가득했다. 내 뒤에는 개인 작업, 논문 작업 등이 수북이 쌓인 상황에서도, 그토록 원하던 삶이 다가왔는데도 말이다. 노예근성이 있어서 그런지, 막상 정기적인 수입이 없어져서인지, 눈앞이 캄캄했다.

명함, 회사 배지 같은 잡동사니 쓰레기들을 정리하면서 더욱 확신했다. 이제 내 길을 가야 할 때인가 보다 하고. 아직 무엇을 할지는 정하지 못했지만. 옆 팀이었던 대리님은 낚시를 계획하고, 또 다른 팀의 팀장님은 인왕산 등산을 계획해 주셨다. 감사할 따름이다.

막상 퇴사가 다가온 시점에서 이제 뭘 해야 하나를 이틀 정도 생각한 듯하다. 주변에서는 아직 생각하지 말고 쉬는 기간이라 여기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안해서 프로젝트를 정리해 보고, 수입원을 생각해 봐야 안심이 되나 보다.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부단히 발버둥 친 지 15년이 되어가는 것 같은데, 점점 입사 때와는 다르게 허우적거리기만 하고 나아지지 못한 것 같다. 실업자 브이로그를 많이 봤나... 앞으로는 프리랜서로 내 삶을 살아야 해서 그런 건가...


사무실 책상

지난날 다른 회사들과의 퇴사를 생각해 보았다. 여러 회사를 다녀서 그런지 사진첩에는 내 사진은 없고 내가 쓰던 책상 사진들만 있었다. 20대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아서 사무실 책상을 찍어두지 못했던 것 같다. 이제는 사진을 찍어둘 만큼 의미 있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퇴사 전날 사진을 찍어두었다. 이 한 장으로 어떤 위치인지는 설명할 수 없다는 걸 알지만, 또 다른 기록을 남겨보았다.

지나고 보니 이러한 사진들은 단순한 기록을 넘어 삶을 추억할 수 있는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데스크의 의미도 점차 달라졌다. 추위를 같이 이겨내고, 지친 두 팔이 기댈 수 있는 든든한 지지대였다. 간식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잠깐의 여유를 찾는 나만의 공간이었고, 나와 함께 했다. 야근이 길어지는 밤, 업무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하거나, 모니터의 차가운 빛 아래서도, 시간에 쫓기는 스트레스 속에서도, 책상은 나를 지지해주고 있었다. 스레드에서 매일 같은 자리의 책상을 찍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그 정도의 기록은 아니지만, 나도 내가 머물렀던 자리들을 하나씩 올려본다. 각각의 사진 속에는 그 시절의 내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들이 있다. 추위를 이기려 했었고, 번잡함을 지우려 했으며, 나름의 기획을 하거나, 관리를 하고자 했던 생각들이 반영되어 있다.

이번 사진을 찍으면서 문득 아마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타인이 주인인 소속에서, 정해진 자리에 앉아 일하는 것을 말이다. 나의 책상들을 되돌아보니, 그것들은 단순한 가구가 아니라 업무 과정 자체였다.

이제 새로운 시작에서, 어쩌면 더 이상 남의 책상이 아닌, 나만의 공간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내 공간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다는 것을, 나는 잊지 못할 것 같다.



냉장고 채우기

그동안 집에서 음식을 먹을 일이 없어서 냉장고가 텅텅 비어 있었다. 항상 외식하거나 배달 음식을 시켜 먹었었다.

일단 이 뇌의 타격감부터 치유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제일 먼저 한 일이 냉장고 채우기였다. 이제는 돈도 몸도 살펴야 하니, 제일 먼저 한 것이 반찬 채우기, 과일 채우기, 달걀 채우기였다. 그리고 좋아하는 자몽 주스, 그릭 요구르트 등을 채우니 오히려 건강해질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아... 건강해지라고 쉬는 시간을 주시는 건가 싶었다. 근래에 건강검진 결과가 좋지 않게 나왔고, 장기 복용 중인 약도 있었다. 그러다 문득 재검사를 받았던 갑상선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지 다시 찾아보았다. 한 달 전에 문자가 와 있었는데, 이것도 모르고 일만 했나 보다. 한 달 전에 나온 갑상선 결과는 수치가 안정적으로 정상 범위로 나왔다. 다행이다.

이제 뭘 해야 할까 싶었다. 그러자 문득 그동안 배워보고 싶었던 무용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매달 지출 비용이 부담스럽긴 하겠지만, 배워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고, 알아보기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다. 이렇게 생각하니 깊은 수렁에서 조금 나온 기분이긴 하다.

그리고 앞으로 주업으로 삼고 싶은 글 쓰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이렇게 또 한 번 살아보자!

그런 마음이다.


2025.09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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