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라운지

by 봄플

KTX 서울역 대합실에 앉아 주문한 미역국 한 그릇이 17,000원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괜스레 마음이 허틸해졌다. 출장 준비를 하던 중 문득, 몇 년 전 어느 공항 비즈니스라운지에서의 기억이었다. 그때와 지금, 같은 출장길이지만 이토록 다른 풍경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이 받아들여지기 힘들었다.


비즈니스

그때의 나는 스물몇 살, 세상이 허무하고 다른 세상을 궁금해했던 나이였다. 그런 내게 기회가 닿아 몇 차례 비즈니스라운지에 초대받게 되었는데, 그 기억은 지금도 또렷하다. 설레는 마음으로 첫발을 내디뎠을 때, 내 눈앞에는 잔잔한 조명과 깔끔한 인테리어가 펼쳐져 있었다. 직원들의 정중한 서비스는 나를 낯설게도, 동시에 따뜻하게 감쌌다. 하지만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그곳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언뜻 보기에는 모두가 여유롭고 자연스러워 보였지만, 자세히 관찰해 보니 그들도 각자의 바쁜 일상을 살고 있었던 것 같다. 가족 단위로 온 사람들도 있었고, 출장차 들른 듯한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보여주는 차분함과 품격이 오래도록 내 마음에 남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은 작은 접시에 담겨 있던 햇 초록사과였다. 그 산뜻한 향과 아삭한 식감이 공간의 공기와 겹쳐져 더욱 특별하게 다가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단순한 과일 한 조각이었지만, 당시의 나에게는 마치 그 사소한 맛조차 전혀 다른 감각을 보여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라운지로 나를 이끌어준 분들과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면서도 자꾸만 궁금증이 커졌다. 그분들은 여행 중이셨지만 동시에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느라 바쁘신 모습이었다. 가끔 기획 아이디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조심스럽게 말을 아끼시는 듯했는데, 아마도 쉽게 노출되는 것을 꺼려하셨던 것 같다. 이 분들은 도대체 무슨 일을 하시는 걸까? 어떤 시간을 지나왔기에 저런 품격과 안정감을 지니게 된 걸까? 아직 미숙한 삶을 살고 있던 20대의 내게, 그들은 하나의 거대한 롤모델처럼 보였고, 동시에 언젠가 닮고 싶은 어른들의 얼굴이었다.



KTX

그로부터 세월이 흘러 지금의 나는 그때와는 사뭇 다른 자리에 있다. 더 이상 비즈니스라운지를 쉽게 드나들지 못하고, 대신 이렇게 붐비는 대합실에서 기차를 기다리며 출장길에 오른다. 일반석에 앉아 창밖 풍경을 바라보는 일이 훨씬 익숙해진 지금, 과거의 경험은 때로 꿈처럼 아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아쉬움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때 만났던 어른들처럼 살고 싶다는 바람이 더욱 선명해졌다. 언젠가 나도 해외를 오가며 일하고, 세계 곳곳의 공항을 지나며 라운지를 자연스럽게 드나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이 더 구체적으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이제 문득 떠올리는 그때의 기억은 단순한 그리움이 아니라 새로운 다짐이 되었다. 그분들의 직업이 이제 나의 것이 되기를, 그리고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또 다른 세계를 열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게 된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이 단순하지 않다는 걸 안다. 그런 자리에 선다는 것은 단순한 행운이 아니라, 막중한 책임과 무게를 감당해야 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편안해 보이던 그들의 뒷모습에도 분명 보이지 않는 희생이 있었을 것이다. 깊은 밤까지 이어지는 회의, 날마다 내려야 하는 어려운 결정, 그리고 끊임없는 자기 계발에 대한 압박감까지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원하는 것은 비즈니스라운지라는 공간 그 자체가 아니다. 그보다는 그것이 상징하는 성취와 여유, 그리고 무엇보다 누군가에게 기회를 열어줄 수 있는 위치에 서고 싶다는 바람이 더 크다. 책임이 무겁다는 사실이 두렵기보다는, 오히려 그 무게를 견디며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앞선다.


두 향기 사이

오늘 나는 KTX 기차에 오른다. 좌석은 평범하지만, 마음속에는 여전히 비즈니스라운지에서 느꼈던 설렘이 살아 있다. 그때의 반짝임을 기억하며, 언젠가 젊은 누군가를 그곳에 초대할 수 있기를, 그리고 그들의 눈 속에 비치는 빛나는 순간을 함께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란다. 지금 생각해 보니 비즈니스라운지가 정돈된 샤넬 향수 같은 느낌이라면, 서울역의 KTX 대합실은 지친 몸을 붙잡는 커피 향 같은 공간일지도 모른다. 그때 손에 쥐었던 초록사과의 산뜻함과 지금 손에 남은 커피의 쓴 향이 교차하면서, 나는 여전히 두 세계를 오가며 나만의 길을 준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날이 오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나는 조급해하지 않으려 한다. 물론, 그런 삶을 살지 않고 나대로 살 것 같기도 하다. 대신 오늘도 한 걸음씩,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어깨를 키워가며, 묵묵히 길 위에 서 있을 뿐이다.


2025.08 작

퇴사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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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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