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곤 쉴레의 화풍을 좋아하지 않는다.
추문만큼 그림에서도 느껴지는 바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작품을 폄하하고 싶지는 않다. 자극적이지 않으면, 사람들의 시선에 들지 않는다면 도태될 시장에서 그는 우아하게 살아남았다. 이는 분명 존경할 만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존경이 곧 취향까지 될 수는 없는 듯하다. 그의 화풍을 따라 하는 사람들을 많이 봐왔다. 소위 겉멋에 불과한 느낌이었다. 에곤 쉴레는 화풍이 일관적이고,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해 보인다. 선이 매끄럽지는 않지만, 만화처럼 두드러지게 표현하지도 않고, 선 자체가 주되게 말하는 내용은 없어 보인다. 그는 선보다는 질감을 잘 쓴다. 그러나 그를 따라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선에 치중한다. 여기서 그들의 한계가 드러난다. 쉴레의 선은 윤곽을 규정하는 도구가 아니라, 형태를 암시하는 최소한의 장치에 가깝다. 그가 선을 직접적으로 드러낼 때는 대개 습작이나 드로잉 단계에서다. 완성작에서 선이 보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질감, 색, 면 속에서 그의 사색을 풍기는 선이다. 그래서 그의 화면은 더욱 분명해 보인다. 내가 느끼기에는 선은 글과 같이 날카롭고, 면은 이야기처럼 감상할 수 있는 여백을 준다.
이런 작가의 사색을 아우라로 뿜어내는 국내 작가 중에서는 나얼도 있다. 그는 이미지를 레이어처럼 겹쳐 쌓는다. 나는 그를 가수로 알게 되었고, 작가로서도 좋아하게 된 듯하다. 연예인들이 작품 전시를 하면 사실 인정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그는 전문적이다. 그리고 그의 노래와 화풍은 닮아 있어, 진정한 예술가임을 인정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에곤 쉴레와 나얼은 담배를 머금은 듯 세상을 회색빛으로 보는 듯하다. (필자는 담배를 피워본 적이 없어 잘 모르긴 하다.) 나얼이 추구하는 작품은 주로 콜라주이지만, 드로잉만 보자면 선으로 면을 채운다. 콜라주는 팝아트와 비슷하지만, 그의 드로잉이 함께 포함되어 있어 어느 한 부류로 특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사실 나는 클로드 모네처럼 빛을 잘 쓰는 작품을 더 좋아한다. 어둠을 다루는 에곤 쉴레나 나얼과는 정반대의 세계관이다. 하지만 어둠을 진한 색채로 눌러 표현하는 작가들도 멋지다고 느낀다. 결국 빛이든 어둠이든, 작가가 그것을 어떻게 다루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20대 때 나는 이 모든 화풍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오히려 내 화풍을 결정하지 못했다. 쉴레의 질감도, 모네의 빛도, 나얼의 콜라주도 모두 매혹적이었다.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은 다른 것들을 포기한다는 의미처럼 느껴졌고, 나는 그 선택 앞에서 주저했다.
1960년대 이후 미술계는 다양한 흐름이 공존해 왔지만, 내가 주목하는 것은 작가 의도이다. 추상표현주의 이후 미니멀리즘과 개념미술이 대상의 재현 자체를 거부하던 시기를 지나, 포토리얼리즘은 1960년대 후반 다시 재현으로 회귀했다. 이후 극사실주의(슈퍼리얼리즘)와 하이퍼리얼리즘으로 이어지며 재현의 방식은 더욱 정교해졌다. 물론 팝아트는 대중문화를 끌어들였고, 신표현주의는 다시 감정의 격렬함으로 돌아갔지만, 나에게는 '어떻게 보이는가'의 문제가 늘 흥미로웠다.
최근 들어 극사실주의와 하이퍼리얼리즘의 차이가 헷갈리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극사실주의는 사진을 충실히 재현하는 데 집중하고, 하이퍼리얼리즘은 사진보다 더 강렬한 현실감을 만들어내기 위해 작가의 해석이 개입된다고 본다. 극사실주의가 ‘사진처럼’이라면, 하이퍼리얼리즘은 ‘사진보다 더’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조형분야에서 극사실주의는 인체의 실리콘 복제에 가까울 정도로 정밀한 재현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하이퍼리얼리즘은 빛, 물, 유리 등 반사와 굴절이 복잡한 소재를 많이 활용해 표현되는 것 같다. 명도 대비를 강하게 사용하면 형태가 명확해지고 질감이 분명해진다. 이는 감상자의 시선을 즉각적으로 사로잡는 전략이기도 하다. 다만 이것이 기술적으로 더 쉽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그 명료함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극도의 인내와 정밀함이 요구된다. 수채화에서도 하이퍼리얼리즘은 나타나지만, 아크릴이나 유화와 달리 수채화는 덧칠과 수정이 어렵고 명도 대비를 강하게 끌어올리기 힘들어 오히려 더 어렵지 않았을까 싶다.
분명하게 느껴지는 그림을 그리면서도 작가의 창의성을 반영하고 싶은 욕심은 누구나 가지고 있지 않을까 싶다. 나 또한, 형태를 똑바로 그리고자 했으나, 항상 미완으로 두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그 이유는 그림과 현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두어, 여백으로 궁금증을 자아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내가 의도한 완성이었다. 하지만 어떤 이는 그것을 시간 부족이나 기량 부족으로 읽을지도 모른다.
그 시절 나는 여러 기법과 사조를 탐구했지만, 결국 내 것으로 만들지는 못했다. 핑계일 수는 있겠으나, 여전히 그들이 어떻게 자신의 화풍을 결정했는지가 제일 궁금하다. 자신에게 맞고 돈을 벌기 위해 시대의 트렌드를 따랐을 수도 있다. 그래도 분명 그들만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쉬운 길을 택한 것처럼 보여도, 그 안에는 필연적인 선택이 숨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미술작품 앞에 서면 가장 깊이 파고들게 되는 질문은 언제나 같다. 그들은 왜, 그리고 어떻게 자신의 화풍을 선택할 수 있었을까.
2025.09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