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질의 개연성

감정에 대해 솔직해지기

by 봄남

먼 미래의 계획을 세우고 그것이 이루어질 것들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뿌듯해 질때가 있었다. 지금은 아직 아니지만 당장 뭐라도 이룬 사람처럼 흥분이 되면 말하다가 의도치 않게 자랑을 넘어 거짓말도 하게 되고 허세를 부리기도 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스스로를 파악하는 실력이 늘면서 설레발 치는 마음은 누그러졌다. 어른 다워 지는 과정 인가보다. 내가 그래서인진 모르겠는데 유독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힘들어진다. 그런데 그날따라 그의 자랑과 허세가 어른답지 못함을 드러냈다.



그날 E씨는 나의 마음을 거스르게 했다. 몇몇 학부모들에게 저녁을 먹자고 제안한 것도 바로 E씨였다. 모두 오랜 만에 봤는데 반가움 보다는 껄끄러움이 왠지 더 컸다. E씨 때문에 예민해져서 그런가. 그는 오늘도 역시 자식 자랑 이야기로 앞 사람과 대화의 물꼬를 텄다. 그것이 그가 대화를 시작할 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지 모르겠지만 매번 신경 쓰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온 신경은 집중되었다.


“글쎄 우리 아이 성적으로 영어 말하기 대회를 나갈 수 있대요. “


물론 매번 마음이 어려운 것은 아니고 사실 부럽 지도 않다. 오늘은 웬일인지 유독 그의 대화 주제가 유달리 어리석어 보였다. 조금 멀리 떨어져 앉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마음을 숨기기엔 적당한 거리였다. 둘의 대화에 관심이 없다는 듯 메뉴 태블렛을 들고 손으로 휘적거렸다. 마치 스테이크 전문가라도 되는듯 능숙하게 메뉴를 선정했다. 그리고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면서 만나면 해야 되는 인사치레로 어색한 대화를 이어나갔다. 마침내 내가 웃으면서 대화할 때에는 대화의 소재가 우리 아이들 이어서였다.


“걔가 머리가 꼽슬이라 그래요. 이번에 제가 머리를 잘랐는데 꼽슬거려서 티도 안나네요.”


다소 노골적인 나의 감정 변화에 스스로 조금 놀랐다. 스테이크를 먹고 커피숍으로 이동한 후에도 재미도 없고 유익도 없는 대화의 향연이 계속 됐다. 무슨 마음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E씨는 대화의 중심이 본인에게 흐르지 않으면 힘들어하는 것 같았다.


어느 덫 이야기는 그의 한풀이에 관한 것이었다. 남편이 주식 투자를 했다가 저점에서 팔아서 많은 손해가 났다. 그래서 차라리 집안일을 하지 성격에도 맞지 않는 그런걸 하루 종일 보고 있으면서 왜 하고 있냐. 등등이었다. 커피를 응시하며 듣다가 불현듯 그녀의 관종 같은 대화가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아니 좀 불편해 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불만은 더 어렵게 살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사정을 배려하지 못한 것들이었다. 우리 중 누군가 에겐 그런 불만은 사치였다.


그녀가 어린아이 같았다. 그녀의 상황을 이해하려고 해 봤지만 쉽게 되지 않았다. 이야기는 저 멀리 마음 뒤 켠에 무거운 짐을 메고 가는 듯 어렵게 진행 되는 듯 했다. 별로 공감해 줄 수 없는 안타까운 시간을 뒤로 한 채 모임에서 빠져나왔다. 정서적 안정이 필요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도 있어야 할 남편이 아직 오지 않았다. 어머님이 아이들을 재워주고 있었다. 내가 돌아온 시각이 벌써 10시가 다 됐는데 남편이 오질 않으니 괜히 화가 치밀어 올랐다. 분명 그는 열심히 일을 하고 있을 텐데 마치 가정에 충실하지 않는다 던지 나의 건강에 무심한 다던지 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분명 이성적으로는 알고 있었다. 남편은 정말 열심히 일을 하느라 늦게 온다는 것을. 그런데 이럴꺼면 왜 애를 낳았을까. 왜 결혼을 했을까. 가족은 왜 만들어 졌을까와 같은 근원적인 생각하게 돼 본다. 혼자 있기가 너무 싫어서 신경질이 났다. 그가 전화를 받자 마자 대뜸 화를 냈다. 너무 한거 아니냐고. 하지만 몰라서 화를 내는 건 아니었다. 그가 너무 한 것이 아니라 열심히 일을 하느라 그런 것 뿐이라고.


그런데 나의 감정은 나의 이성을 이겨 버리고 굳이 또 기필코 화를 내고 만다. 온갖 신경질을 퍼붓고 나서야 마음이 진정이 된다. 왜 이래야만 했을까 라고 나중에 후회가 밀려오지만 너무 늦었다. 내 전화를 받고 그는 기분이 안좋은 채로 집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아까 전화를 끊고 얼마 되지 않아 기분이 풀렸음에도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또 울화가 치밀었다. 뭐지? 그가 더 미안해 할수록 화가 더 났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데 왜 화를 내고 미안해 해야 했을까. 나는 만나고 싶지도 않은 모임에 가서 스트레스를 받고 그저 남편에게 화풀이를 해야 했을까. 미안 남편. 잘난척하는 E씨가 날 힘들게 했어. 그렇게 남편에게 응석부리고 싶었어. 그리고 보고 싶었어. 착한 남편은 나의 화의 근원도 모른 채 죄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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