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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남 Dec 18. 2023

힘들었겠네

“네가 웬 술? 너 술 못 마시잖아.”

“나 레아랑 헤어졌어.”


진성은 재현이 있는 포장마차로 바로 달려갔다. 의외로 담담한 그의 목소리 때문에 더 걱정이 되었다. 진성이 헐레벌떡 달리며 포장마차를 발견했는데 재현을 보고 멈칫했다. 포장마차에 앉아 있는 재현은 생각보다 정신이 온전한 상태였다. 진성은 걸음을 늦추고 그에게 조용히 갔다. 웬일인지 그에게 슬픔은 없어 보였고 눈빛은 이글이글 타올랐다. 


“그놈에 돈 내가 벌고 말지.” 재현은 포크를 잡은 채 주먹으로 테이블을 쳤다. 진성은 그와 마주 보고 앉아서 말없이 소주를 따랐다. 


       “난 크리스문한테 결국 졌어.” 그는 파란 테이블을 응시하며 말했다. 

“크리스문?”

“그 남자… 레아랑 있었던 그 노파 새끼가 크리스 문이었더라.”

“헐!”


진성은 오버스럽게 표정을 지으며 오 마이갓을 연신 외쳤다. 그 수많은 남자 중에 하필 크리스문이냐며. 진성의 그런 과한 반응이 재현은 좋았다. 위로가 되는 것 같았다. 


“걔는 사자, 난 호랑이.”

“호랑이?”

“아니 얼룩말.”


그는 한껏 시무룩해졌다. 얼룩말이 사자를 이길 확률은 애초에 없다. 이기고 지는 구조는 아니다 그냥 지는 구조이다. 싸움이 안 되는 게임. 어쩌다 얼룩말에게 날개가 생기면 모를까. 


“아니야!”


재현이 갑자기 소리쳤다. 성찬 선배가 말한 것이 생각났다. 성공해야 한다는 그의 말이 신의 신호처럼 마음속에 떠올랐다.


“뭐?”

“나 성공할 거야!”

“그래. 해라 해. 해야지. 응.”

“가난이 날 가두지 못하게 할 거야. 이놈에 가난 때문에 떠나는 여자 하나 못 잡고 나약하게 지켜만 보고 있고! 내가 이 가난에서 무조건 벗어난다!” 


그의 눈은 어느 때 보다 또렷해졌다. 


“그런데 너… 생각보다 멀쩡하다? 시련의 아픔. 비련의 남주인공 뭐 이런 거 안 해?”

“…..”

그는 소주잔을 기울여 술을 더 따르고 입 속에 털어 넣더니 붉은 눈이 되어서는 성난 눈빛으로 말했다.

“끝났잖아. 끝. 슬퍼해서 뭐 할 건데. 돈이나 벌자.”

“그래. 뒤끝 없어서 좋다! 역시 내 친구!”


라고 말한 건 후회했다. 재현이 갑자기 머리를 테이블 위로 쿵 박더니 일어나지 않았다. 그 기운 빠진 덩치를 집까지 들쳐 엎고 오느라 진성은 된소리를 1분마다 해야 했다. 다시는 이 새끼와 술을 마시지 않겠다는 다짐과 함께. 


“미친놈, 개새끼.”



24.





진성은 어느새 소파 위에서 잠이 들었다. 나는 이불을 덮어 주고 살금살금 기어서 엄마의 집을 빠져나오려는 찰나, 진성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여보세요, 뭐? 지금? 왜 무슨 일이야? 어. 어…”


심각해 보이는 그의 얼굴을 보고 괜히 긴장되었다. 그는 헐레벌떡 일어나 가방을 챙겼다. 몇 시간 후면 아내가 급히 귀국하겠다고 했다.


“무슨 일인데?”

“같이 갔던 친구가 갑자기 일이 생겼 나봐.”

“아.. 주하는 괜찮고?”

“응. 그런데 같이 간 친구 말이야. 아까 말 안 했는데, 걔가 레아야.”

“뭐? 정말?”

“응 근데 무슨 일인지 모르겠네. 나도 가서 물어봐야겠어. 누나. 오늘 밥 먹여 줘서 고마워. 나중에 또 얘기해.” 


그는 집으로 갔다. 급하게 귀국할 정도의 일은 무엇일까. 레아는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레아가 정말 큰 일이라도 나길 바랐다. 재현이 마음을 상하게 하고 간 죗값이라도 받았으면 좋겠다는 저주 아닌 저주를 했다. 


집에 오는 길에 나는 이제는 번듯한 고급 아파트로 독립해 나간 동생네 집을 괜히 한 번 지나갔다. 새벽이라 거리가 한산하고 차가 별로 없어 천천히 관광하듯 드라이브할 수 있었다. 그가 이룩해 낸 노력의 결과를 누나로서 늘 자랑스러워했고 뿌듯해했지만 그에게 원동력이 된 뒷 이야기의 근본이 분노였다는 것을 알고 나니 저 아파트가 새롭게 보였다. 


위대해 보였다. 그는 지난 10년 동안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도시 프로젝트 사업을 시작했다. 직장을 그만둘 때 나는 필사적으로 반대했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해서는 빚에 끌려 다니기만 할 뿐 가난을 벗어날 수 없다고 했다. 그의 목표는 빚을 갚는 것이 아니라 성공하는 것이었다. 


그는 죽어가고 있는 동네의 땅을 대거 매입해 문화와 예술이 있는 곳으로 만들어 내기로 했다. 성찬 선배가 그가 하는 프로젝트의 투자를 위해 투자자들을 모았고 많은 예술인들을 모이게 해 대학생들이 일부러 찾아가서 노는 핫 플레이스가 되었다. 


그는 홍보를 위해서 자지도 않고 먹지도 않고 열심히 일했다. 도시는 서서히 살아났고 맛집과 기업들이 동네에 들어와 활력을 불어주었다. 그의 필사적인 몸부림이 그에게 드라마틱한 성공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정말 가난을 탈피했다. 어쩐지 그는 악착같이 돈을 버는 일에 몰두했다. 그가 그러는 동안 나는 그의 해맑고 순수한 모습이 없어져 좀 아쉬웠다. 


그는 한동안 웃는 법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나는 드디어 어제 그의 안에서 느긋한 행복을 보았다. 그가 예전처럼 웃는 일은 없었지만 그가 느끼는 행복의 의미는 더 깊었다. 


‘수고했다 동생.’


다음 날 아침 재현에게로부터 전화가 왔다. 


“누나. 어제 만난 래아 어때? 괜찮은 사람 같아? 착하지.”

“어 너무 예쁘고, 착하고.”

“그렇지? 래아가 어제 긴장 많이 하더라고.”

“재현아.”

“어 누나.”

“네가 결혼을 하다니… 너무 기뻐.”

“그러게. 내가 결혼을 하다니.”


더 이상의 격려와 사랑의 메시지를 전했다가는 손 발이 오그라들어 전화를 던져 버릴 까봐 나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상견례날 나는 그의 존재를 빛내 주고 싶었다.  멀쩡하고 잘 사는 누나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정성껏 화장을 하고 집에 있는 것 중에 가장 비싼 옷과 신발 그리고 가방을 골랐다. 남편의 치장도 손수 해주었다. 평상시 입지 않는 스타일이라 누가 봐도 멋을 낸 티가 났다.  


사돈 어르신 앞에서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최대한 말을 아끼자고 다짐했다. 고급 한정식 레스토랑 안에 따로 마련해 둔 방으로 들어갔다. 사돈어른과 래아는 이미 나와 기다리고 계셨고 나는 자리를 잡고 앉으면서 그들의 분위기와 패션을 빠르게 훔쳐보며 교양의 수준과 품위를 판단하고 있었다. 


어색한 분위기에 대화가 뚝뚝 끊어지곤 했는데 대화가 궁색해지는 만큼 배고픔도 커졌다. 마침 음식이 나왔다. 고급 한정식의 향연은 나를 설레게 했다. 사실 긴장해서 못 먹을 줄 알았지만 맛있는 것의 유희를 잘 알고 있는 혀가 나의 식욕을 자극했고 어느새 넘치도록 먹고 있었다. 


배가 부르면서 뭐가 그렇게 신났는지 재현의 칭찬을 늘어놓다가 재현만 칭찬하기 민망해 래아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녀에 대해 과한 칭찬을 늘어놓았다. 그러다 갑자기 그녀가 너무 사랑스러워 그녀의 발톱마저 칭찬할 기세였다. 나는 어느새엄마보다 말을 많이 하고 있었다. 아니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 중에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남편이 생각해도 조금 민망했는지 나의 옆구리를 찌르며 대화의 양을 조절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레스토랑을 빠져나오면서 재현은 누나 덕분에 분위기가 살았다며, 목구멍까지 답답할 지경이었는데 누나 넉살이 역시 최고였다며 귓속말로 칭찬해 주었다. 역시 피는 나의 끼를 알아봐 주는구나. 나는 한껏 뿌듯했다. 양가 상견례가 무사히 마쳐지고 결혼식 날짜도 잡았다. 6월에 하기로 했다. 재현과 래아에게 특별한 달인 듯했다. 


집에 오자마자 딱딱한 옷과 구두를 벗어던지며 성취의 쾌감을 느꼈다. 남편도 뱀 허물을 벗듯이 일 년에 한 번 입을까 말까 하는 정장을 벗어 방바닥에 늘어놓았다. 그런 모습을 보고 나는 남편에게 한바탕 잔소리를 해댔다. 






“상견례했다며!”

“이야….”


진성과 주하, 래아와 재현이가 오랜만에 저녁 약속을 잡았다. 재현은 곧 있을 결혼식에 앞서 김래아를 친구들에게 소개해 주기로 했다. 그들은 치킨 집에 들어가 치킨과 맥주를 시켰다. 주하는 래아가를 처음에 보자마자 마음에 들어 했다. 어린 친구지만 뚝심이 있어 보이고 성격은 야무져 보였다. 그녀는 주하의 말에 재밌게 맞장구도 칠 줄 알았고 적당히 자기 의견을 어필할 줄도 알았다. 


무엇보다 재현을 바라보는 눈빛에서 꿀이 연신 떨어졌다. 주하와 진성은 그들에게 둘이 어떻게 만났는지, 누가 먼저 고백했는지를 물으며 거의 잃어버린 연애 감정을 느꼈다. 재현은 정말 오래간만에 매우 행복해 보였다. 주하는 래아와 오랜 시간 알고 지냈던 사람처럼 금세 친해졌다. 그들은 결혼식에 들어갈 꽃부터 화장품과 드레스 신혼집에 들일 가구 이야기를 하며 동질감을 형성하고 있었다. 여자들 특유의 높은 고음이 오고 가고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진성과 재현이 결혼식장 이야기로 시작해 돈 버는 이야기를 한참 하고 있는데 마침 벽에 걸린 티브이에서 뉴스가 나왔다. 그들이 돌연 이야기를 멈추자 주하와 래아도 말을 멈췄다. 뉴스에서는 한껏 늙어 흰머리가 가득한 크리스문이 인터뷰를 거절하면서 검문받으러 걸어가는 모습이 나왔고 밑에 자막으로는 ‘크리스문 횡령’과 ‘크리스문 이혼’이라는 글자가 크게 쓰여 있었다. 그는 횡령으로 구치소행이 결정되었고 내연녀 소식이 나오기도 전에 본처와 이혼했다는 소식을 앵커가 호소력 있게 전했다. 


“저분 장난 아니잖아요. 인성이 정말.”


이라고 말하며 래아는 고개를 저었다. 주하는 민망한 듯 티브이에 눈을 떼고 래아와 결혼식 얘기에 다시 열을 올렸다. 진성은 재현에게 잠시 밖에 나가자는 사인을 주었다.  재현은 차가운 밤공기에 숨을 토해 내며 말없이 서 있었다. 진성은 그런 재현을 보고 아무렇지도 않게 레아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주하가 일본 여행 갔다가 갑자기 온 날 있잖아.”

“응.”

“그날 주하랑 레아랑 같이 여행 간 거였어.”

“그래?”

“그런데 저 노친네가 구속되려는지 집안 정리할 것이 생겨서 갑자기 한국으로 들어온 거래. 사실 몇 년 전부터 그 내연녀 때문에 이미 정서적 이혼 상태였고 서류상 이혼은 저번달에 한 거래.”


재현은 아무 말이 없었다. 


“….. 힘들었겠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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