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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남 Dec 15. 2023

잘가

"레아야.”

“응 오빠.”

“오늘도 야근이야?”

“…응. 어.”

“얼굴 계속 못 봐서. 보고 싶어.”

“내일 보자. 내일 주말 이잖아.”


그녀의 대답은 마치 재현과의 대화를 피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짧았다. 예쁜 리본이 달려 있는 조그마한 쇼핑백 안에 든 그 반지는 여전히 재현의 가방 안에 있었다. 퇴근길에 레아에게 전화했더니 이번에도 야근이란다. 야근. 야근. 야근! 재현은 이제 확인해야만 했다. 그녀의 마음을.  


그는 전화를 끊고 그녀의 회사로 갔다. 그녀의 정식 퇴근 시간보다는 이른 시간이니까 가면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가는 내내 한 가지 생각만 했다. ‘레아가 여전히 나를 사랑해 주기를.’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다시 그에게 돌아와 주길 간절히 바랐다. 


그는 엄마가 아이에게 모유를 주듯 한 없이 자상해져서는 그녀의 모든 결점도 받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그때는 내가 너무 했지, 내가 좀 더 배려할 걸, 내가 더 양보할 걸’이라고 못해준 것들만 생각났다. 그가 그녀의 회사에 도착하고 회전문을 통과했을 때 그는 드디어 결심한 듯 크게 숨을 들이켰다. 엘리베이터에서 올라가는 화살표를 누르고 엘리베이터 문에 반사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머리를 매만졌다. 


그의 마음은 결판을 내려고 출발했던 초심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녀를 품자. 용서해 줄 것이다. 곧 중요한 일이 일어날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때 심란을 가중시킨 건 누군가의 급습이었다. 멀리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재현 씨!”

“?”


그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 재현의 옆에 다가섰다. 재현은 그제야 누군지 알아보았다.  크리스 문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그런데 여긴… 왜?”

“누굴 좀 만나러 왔어요. 재현 씨는 이 회사 다니나요?”

“아니요. 저도 누굴 좀 만나러.”


잠시 침묵이 흘렀다. 뜻밖의 만남치고 재현은 그를 너무 반가워하지 않았다. 반면 크리스문은 그를 향해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여전히 세련 됐고 에너지가 넘쳐 보였으며 이제는 조금 잘생겨 보이기까지 했다. 그들이 엘리베이터에 타고 동시에 10층 버튼을 누르다가 눈이 마주쳤다. 


그때 재현은 뒷골에 저릿함이 느껴졌다. 


띵동.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문이 열렸는데 그 앞에는 기다렸다는 듯이 레아가 서 있었다.


“어!”

“어!”


레아는 놀라서 두 손으로 입을 막았고 크리스문은 레아를 보자마자 반가운 듯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안았다. 그런 그들을 재현이 우두커니 지켜보았다. 레아의 길 잃은 시선과 크리스문의 활짝 핀 미소, 연인처럼 나란히 선 그들. 그들을 지켜보다 얼음이 된 재현. 


“레아를… 보러 오신 거였어요?” 재현은 겨우 입을 열었다. 

“빙고!”


크리스문은 손가락으로 총을 쏘며 재현에게 윙크를 했다. 그 방정맞은 행동은 레아를 안고 있는 자의 여유였을까. 그의 자신감이 역겨웠다. 재현은 진성이 말한 그 중년의 남성이 크리스 문이었다고. 레아를 돈으로 꼬신 그 노친네가 크리스문이었다고, 진성에게 뉴스 리포터처럼 긴급 뉴스를 전하고 싶었다. ‘다시? 왜 하필 크리스 문이야? 무슨 미련이 남았어?’


재현은 믿을 수 없었다. 그들이 다시 만난 다는 사실에 기가 찼다. 


“레아야.”

“아.. 오빠. 잠시만.”


레아는 크리스문을 데리고 어디론가 가가려고 했다. 


“크리스문!”


재현이 힘주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자신을 떨궈 놓고 둘이 떠나는 모습을 보는 건 죽을 맛이었다. 그러자 크리스문이 레아와 함께 가던 길을 멈추었다. 


“저도 레아를 보러 왔어요. 제 여자친구거든요.”


재현이 그의 뒤통수에 대고 소리쳤다. 크리스 문은  조금 놀라는 기색과 함께 서서히 뒤돌아 섰다. 그리고 레아의 팔을 거두어 내고 재현에게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재현은 ‘덤비기만 해 봐라 어디 한 번.’의 마음으로 침을 꼴깍 삼켰다. 그의 빛나는 갈색 구두는 재현의 발을 조만간 밟을 기세로 쳐들어왔다. 재현 보다 키가 작은 그는 재현의 코 앞까지 오더니 눈을 올려다보았다. 조금 무서운 눈매였다. 


“알고 있어, 멍청아.”


그는 작게 속삭였다. 그는 한쪽 입꼬리만  재수 없게 올려 보였다. 재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를 노려 보았다. ‘알고 있었다고?’ 재현은 ‘이단 옆차기 기술을 아껴놨다 뭐 하냐 지금 쓰자’라고 생각했지만 다리는 땅에 박힌 나무처럼 굳건히 움직이지 않았다. 


레아가 다시 다급히 크리스문에게 오더니 그를 잡고 다른 곳으로 피신시켰다. 재현은 모욕을 느꼈다. 땅딸막한 크리스문의 위협보다 레아가 챙긴 사람이 크리스문이라는 사실이 재현에게 더 모욕적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얼마 있지 않아 혼자 걸어 나왔다. 고개를 숙인 채. 


“너…”

“오빠, 설명할게. 일단 나가자.” 그녀가 재현을 잡고 나가려고 하자,

“아니 여기서 말해. 자초지종을 설명해.” 재현이 그녀를 잡아 바로 세웠다. 


그녀는 회사사람들이 자신들을 볼 까봐 두려운 모양이었다. 이미 크리스문의 등장으로 몇몇 사람들이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듯했다. 게다가 몇몇의 회사원들이 지나가면서 그들을 판단하는 눈빛으로 힐끗 쳐다보았다. 그녀는 점점 낯 뜨거워지고 있는 중이었고 재현은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애라 모르겠다 눈을 질끈 감고… 거의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나 좀 있으면 약혼해.”

“뭐!”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주변 사람들이 일제히 조용해지며 그들을 쳐다보았다. 별일이 아닌 것 같자 하나 둘 자신의 일로 돌아가더니 서서히 노동 소음이 다시 생겼다. 


“참나.. 나 좀 헷갈리는데 우리 약혼도 하자고 했었나?”

“크리스문이랑. 크리스문이랑 약혼한다고.”


그녀는 재현이 행여라도 흘려들을까 봐 또박또박 정확하게 그의 이름을 말했다. 재현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그녀는 심장이 뛰다 못해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게… 부모님이… 알잖아 오빠도. 내가 우리 부모님 말을 거역하는데도 한계가 있지….” 그녀의 목소리는 심하게 흔들렸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 


그는 가방에 있는 반지를 꺼내 그녀에게 쥐어 주었다. 그녀는 한 손엔 반지를 한 손으로는 놀란 입을 막고 있었다. 


“너… 어… 어디까지 진실이야. 날 사랑하긴 했어?”

“오빠를… 사랑해.”

“그럼 나랑 결혼해.” 그는 억지를 부려 보았다. 생떼를 쓰고 싶었다. 무릎이라도 꿇고 싶었다. 

“난.. 오빠 난…”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화를 삼키며 먼 곳을 응시하다가 말없이 돌아섰다. 그 재수 없는 새끼의 재력이 제일 큰 이유라면 재현은 레아를 놔주어야 했다. 얼룩말이 사자에게 덤비면 안 되듯이. 그는 무력해졌다. 


엘리베이터가 ‘이제 그만 그녀는 버리고 타기나 해!’라고 말하는 듯 세차게 띵동! 하며 문이 열렸다. 그는 울고 있는 레아를 마지막으로 차갑게 바라보며 ‘닫힘’ 버튼을 눌렀다. 그의 머릿속에는 크리스문이라는 메아리가 의미 없이 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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