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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남 Dec 14. 2023

가난을 선택할 용기

집에 도착한 재현은 아버지가 없는 텅 빈 거실을 초점이 없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다녀왔습니다.”


그는 자신을 위해 속삭였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바로 방에 들어갔다. 그는 가방에 있는 반지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돌을 이고 온 듯한 몸을 침대 위로 던져냈다. 뭐가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그녀가 그에게 부족했던 것은. 언제부터 그 남자를 만났을까. 그 남자는 누구일까. 아니, 그 남자만 있었을 까. 수 만 가지 질문이 머릿속에 오고 갔지만 그는 그저 눈을 감았다. 


띠리리링.


“여보세요.”

“오빠. 나야. 나 이제 야근 끝났어.”

“….”

“여보세요? 오빠?”

“나 좀 피곤해서… 잘게.”

“…응.”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맑고 아름다웠다. 거짓말을 할 때에도 그녀의 목소리는 아름다웠다. 그는 당장이라도 버럭 신경질을 내고 싶었지만 차오르는 분노 보다 허탈감이 더 컸기에  그저 눈을 감을 뿐이었다. 그는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아니 미워하고 있었다. 아니 사랑하고 있었다. 




“야! 어떡하려고 그래!”


주하가 레아의 팔을 야무지게 때리며 난리를 부렸다. 점심시간에 주하와 잠깐 만나 커피 타임을 갖는 것이 요즘 레아의 즐거움이었다. 주하는 아직 취업 전이고 그래서 자신의 회사 근처에서 학원을 다니며 취업 준비를 하고 있었다. 주하 역시 취업 경쟁의 쓰나미 속의 돌파구처럼 레아를 만났다. 


커피를 마시며 지나가는 말로 레아는 다른 남자를 만나겠다고 했다. 그걸 들은 주하는 마시던 커피를 내뿜을 뻔했다.  레아의 부모님이 재현을 싫어하는 걸 모르는 건 아니지만 레아에게 다른 남자를 만나 보라고 제안했고 그런 제안을 그녀가 받아들인 것에 대해서는 주하에게 가히 충격적이었다. 


레아는 다른 남자도 만나 보지 않으면 인연을 끊겠다는 부모님의 압박을 견딜 수 없었다. 실제로 객기도 부려 보았지만 그런 혈기는 당장 결제 해야 하는 신용카드 비용 앞에서 쉽사리 식었다. 그리고 그녀는 아니라고 강조했지만 어느새 부모님의 설득에 넘어간 듯 보였다. 


가난도 괜찮다던 레아의 순진한 선언을 주하는 처음부터 못마땅해했다. 


그녀가 궂은일을 한 것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예상이 안 되었던 건 아니었지만 마지막 찰나에 방향을 바꾸는 그녀의 얍삽한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화가 났다. ‘거봐라’가 나올 줄 알았는데 ‘재현 오빠는?’이 생각났다. 


레아는 눈물이 가득 찬 눈으로 주하에게 하소연했다. 그런 눈물 앞에서는 누구라도 매정하게 ‘너도 어쩔 수 없는 속물이구나’라고 꾸짖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결국 경제적으로 부유한 남자를 만나 보겠다고 했고 레아의 결정에 주하는 그런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겠다는 듯, ‘그럴 수 있지,’ ‘힘들었겠다.’를 반복했다. 물론 정말 그녀의 마음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결정을 속으로는 사실 비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괜히 레아에게 반기를 들 필요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녀의 선택을 존중해 주고 싶었다. 레아는 어차피 자신의 조언을 듣지 않을 것이 뻔했고 그런 일로 갈등을 만들고 싶진 않았다. 주하는 괜히 재현의 존재가 거리꼈다. 그에게 동정심을 느꼈다. 아마 그 동정심 때문에 레아의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하는 생각했다. 


“난 재현 오빨 사랑해.”


레아는 심란한 표정을 지어 보이다가 생각 끝에 ‘가난이라도 좋아.’라고 말했던 선언처럼 주하에게 소리쳤다.


 주하는 레아의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녀는 그를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이기적인 레아의 태도에 주하는 왠지 심기가 불편해졌다. 그녀의 자태는 이제 교양이 없고 깊이가 없어 보였다. 그녀가 치장한 모든 것들이 그저 허세에 불과해 보였고 식견이 좁아 보였으며 싸구려 같았다. 레아는 그동안 자신의 도덕적 허세를 위해 어려운 사람을 도왔을 뿐 어려운 사람들의 심정을 정말 알리 없었다. 


“…. 그래.”

“하지만 반지 보러 갔을 때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

“왜?”

“오빠가 반지 가격표를 보고 표정이 굳어지더라. 그 모습을 보니까 갑자기 가슴이 멍울지는 느낌이 드는 거야. 굉장히… 뭐랄까… 답답했어. 앞으로 이런 쇼핑은 꿈도 꾸지 못하는 것일까. 뭐 그런 생각이 드니까 오빠와 내가 굉장히 멀리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어. 오빠는 백화점에 있는 내내 다른 나라 관광하는 것처럼 계속 두리번거리더라. 그 모습을 보니까 오빠를 접어서 가방에 넣고 싶었어.”

“재현 오빠는 그날 거기에 처음 가 봤을 거야.”

“맞아. 나도 알아. 나도 안다고!”


레아가 괜히 성마른 소리를 내자 주하가 하려던 말을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주하는 그녀와의 대화가 싫었다. 하지만 누구라도 재현을 선택할 용감한 여자가 있을지 생각해 보자 허탈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레아는 오늘 밤  그 ‘부자 남자’를 만난다고 했다. 주하는 레아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녀의 차가운 손을 잡았다.


“잘 만나 보고 와.”

“고마워.”

“더 좋은 남자일지도 몰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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