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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남 Dec 13. 2023

진실과 대면한다

<누나 시점>


나는 레아가 가난은 괜찮으니 반지만 해달라고 했던 말이 조금 의아했다. 정말 가난을 모르는 철부지가 아니면 그런 제안은 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오랜만에 들린 친정에서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고 있었다.


 초저녁 시무룩하게 들어온 재현을 불러 자리에 앉힌 다음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보자 그가 그 반지 사러 갔던 이야기를 했다.  나는 그녀가 재현에게 했던 제안에 놀랐고 그 액수에 한 번 더 놀랐다. 정말 우리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 같았다. 


나는 한숨을 쉬며 무릎을 잡고 일어났다. 몰랐던 전개는 아니지만 재현이 아파하는 모습은 차마 볼 수 없었다. 나는 거실에 늘어놓은 아빠의 유품을 계속 정리하면서 그의 좌절을 모르는 척했다.


“아빠 말이야…. 너랑 얘기 한 번 더 하시려고 밤늦게까지 널 기다리신 거래.”

“대화는… 안 했어.”

“그러게… 그게 우리 아빠셨지. 생각과 말과 행동이 다른 것. 너 어렸을 때 그렇게 아끼고 쪽쪽 빨았는데. 나보다 더 예뻐하셔서 내가 얼마나 질투했다고. 너랑 레고 하지, 너랑 자동차 놀이 하지, 나랑은 뭐 놀아주지 않으셨던 것 같아. 아빠 사업이 뒤집어지기 전까진 정말 자상하셨는데.”

“….”

“아빠 배신하고 나가신 분도 그 후로 얼마 안 있어 죽었데.”


나는 재현이 듣든지 말든지 넋두리를 계속했다. 그게 아빠의 그리움을 달래는 나의 방식이었다. 재현이를 더 예뻐했어도, 더 놀아줬어도, 그저 살아만 계신다면 좋겠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나의 이런 말이 그에게 거북함을 주었는지 그는 아무 대꾸 없이 앉아 있었다. 그는 한참이나 아빠를 증오하고 있었던 터라 나의 그 어떤 말에도 긍정할 수 없었을 것이었다. 그는 부정의 의미로 침묵을 이어 나갔다. 


“자, 이거.”

“그게 뭐야?”

“네가 그동안 아빠 빚 갚아주려고 준 돈 아빠가 안 쓰고 모아 두셨어.”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조금이라도 누나 티를 내기 위해 눈물을 숨기고 싶어 조금 훌쩍였다. 

“뭐?”


그가 벌떡 일어나 나에게 오자 나는 구깃구깃한 통장을 재현에게 들이밀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한참을 들여다보다 머리카락을 쥐어 잡았다. 


“누나!”


그는 소리쳤다. 그것이 분노인지 놀라움인지 기쁨인지는 잘 가늠이 안 됐다. 그는 그러다 놀란 토끼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는 반지 가격의 영을 세었던 것처럼 고개를 까닥까닥하며 돈의 액수를 세었다. 5천만 원가량의 돈이 안에 들어 있었다. 재현이 보내준 돈 1원 하나 안 쓰시고 모으셨다. 재현은 입 바람으로 자신의 앞머리를 불어 올리고 손으로 머리카락을 쥐어짜며 거실 돌아다니는 것을 반복하다 결국 베란다로 향했다. 그리고 한 참을 끄억끄억 우는 것 같았다. 


저녁이 되자 나는 울다 지친 재현을 위해 그가 가장 좋아하는 참치김치찌개를 끓였다. 뜨거운 냄비를 식탁 가운데 놓고 마주 앉아 같이 먹기 시작했다. 그는 밥을 먹다가도 울컥했는지 숟가락질을 자주 멈칫했다. 나는 그걸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힘들어져 조금이라도 유쾌해지고 싶었다. 휴대폰을 뒤적거리며 내 자식 걷는 영상, 막 말하기 시작하는 영상을 두루 보여주었지만 그는 잠시 웃기만 할 뿐 힘을 내는 기색은 없었다. 


“잘 써. 그 돈.”


그는 대답 대신 또 끄억끄억 울었다. 동생이 어른이 되어서 우는 건 처음 봤다. 나는 감정을 억누르고 재현의 어깨를 감싸 안고 위로해 주다 벌컥 대성통곡을 하고 말았다. 






재현은 회사 일을 조금 일찍 마치고 레아가 골랐던 반지가 있는 백화점으로 향했다. 아버지가 모아두신 돈으로 반지를 살 참이었다. 그리고 레아가 그동안 자신을 위해 배려해 준 마음이 하나 둘 생각났다. 생각해 보면 레아는 재현에게 많은 것을 양보했다. 그는 그동안 그들이 데이트했던 곳, 먹었던 음식을 생각해 보았다. 전부 저렴하거나 공짜인 곳들이 많았다. 


그는 갑자기 그녀에게 한 없이 미안해졌다. 


그가 다시 명품관에 들어갔을 때 저번에 응대해 준 직원이 재현의 얼굴을 보고 아는 척을 했다. 


“오늘은 혼자 오셨네요.”

“네. 여자친구 좀 놀래 켜 주려고요. 그거… 제 여자친구가 보던 걸로 주세요.”

“네 잠시만요.”


직원의 친절한 미소가 그를 응원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녀가 그 반지를 들고 나오자 그제야 재현은 그 반지의 자태를 자세히 바라볼 수 있었다. 두껍지도 얇지도 않은 플래티넘 밴드에 영롱한 빛을 발하는 콩알만 한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고 그걸 네 개의 지지대가 꽃받침처럼 받치고 있었다. 정말 아름다웠다. 반지를 살펴본 후 미소를 지은 뒤 직원에게 카드를 내밀었다. 그녀가 원하던 그 삼천 만원 짜리 반지를 결제하고 나니 기분이 새로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기뻐할 모습을 상상하기만 해도 신이 났다. 


 ‘이제 진짜 프러포즈할 수 있겠구나.’ 


반지를 주기 위해 고급 레스토랑도 예약해 놓았다. 그는 기쁜 마음으로 레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빠, 나 아직 일이 안 끝났어.”

“우리 오늘 그 레스토랑 가서 밥 먹기로 했는데… 내가 줄 것도 있고 말이야. 하하.”

“하.. 오빠 나 오늘도 야근이야.”

“일이 많아?”

“나 팀장님한테 찍혔 나보다. 자꾸 나만 야근을 시키네…”


재현은 그녀가 ‘야간’이라는 소리를 하자 난데없이 예민해졌다. 또 야간이라니. 그는 침착하게 레스토랑 예약을 취소하고  뒤이어 진성에게도 전화를 해볼까 하다가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서 관두었다. 그러다 문득 잠깐 얼굴이라도 보아야겠다고 생각해 그녀의 회사로 향했다. 


일단 그는 홀로 회사 앞 커피숍에 들어가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적당한 시간이 되면 그녀에게 커피라도 사다 줄 작정이었다. 창문이 커다랗게 나 있는 쪽의 테이블을 잡고 앉아 커피를 마시며 배고픔을 달랬다. 그곳에 앉아서 레아 회사 건물의 회전문이 돌아가는 것을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가방 속에 자신이 산 반지가 잘 있는지 힐끗 쳐다보았다. 고급스러운 리본이 매여 있는 작은 쇼핑백을 보고 안심한 듯 미소 지었다. 


마실 커피가 떨어지자 그는 서서히 일어났다. 


그러다 문득 회전문 앞을 보았다가 다시 자리를 잡고 앉아 버려야 했다. 레아가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시계를 보다가 좌우로 살피고 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아 보였다. 1분이 채 지나지 않아 진성의 차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그녀는 반가운 기색으로 진성의 차로 달려가 즐겁게 조수석에 앉았다. 재현은 목구멍이 막히는 걸 느꼈다. 그녀의 두 번째 거짓말이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레아에게 전화했지만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는 바로 뒤이어 진성에게 전화했다. 그도 역시 받지 않았다. 


‘이것들!’


그는 반쯤 미친 사람처럼 진성이 받을 때까지 전화를 걸고 또 걸었다. 재현의 심장은 터져 나올 듯했다. 그는 이제 심증의 벽을 허물고 사실과 대면하기로 했다. 


“여보세요.”


그렇게 30분이 지났을까. 드디어 전화를 받았다. 


“너 어디야! 이 새끼야!”

“여보세요? 재현이? 무슨 일이.. 야?”

“어디냐니까. 당장 말해.”

“여기 그때 우리 저녁 먹었던 곳 앞이야.”

“딱 기다려.”

“왜 그래? 왜 그러는 거야?”


뻔뻔한 진성의 목소리에 기가 찼다. 


거짓말을 하려면 이런 뻔뻔함은 기본인가. 재현은 택시를 잡고 그들이 주하와 오랜만에 만났던 레스토랑으로 갔다. ‘최대한 빨리 가주세요.’라고 다급하게 말하자 택시기사가 추격전을 벌이듯  총알 같이 달렸다. 그는 진성의 차 뒤에서 내렸고 마침 차 옆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진성을 향해 달려가 단번에 펀치를 날렸다. 진성은 바닥에 보기 좋게 널브러졌다.  재현은 그런 진성을 보며 숨을 몰아 쉬었다. 


“뭐야!”


진성이 옷을 털고 일어나며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신경질을 내자 재현이 소리쳤다.


“헉. 헉. 레아 어딨 어!”

“….”

“아까 너랑 차 타고 간 거 다 봤어 이 씨발 새끼야.”

“하.. 야. 그렇구나. 일단 앉아.”

그가 또다시 펀치를 날리려고 하자 진성이 그의 팔을 붙들어 잡고 말했다.

“야야야. 일단 들어봐.”

“뭘 들어 이 새끼야! 너희 둘이 뭘 하고 다니는 거야!”


뭘 들으라는 건지, 혹시 그들에게 어떤 사랑의 스토리가 있었는지 싶어 마음이 저릿해 왔다. 그가 호소하는 눈빛으로 재현에게 살며시 운을 띄었다. 


“나… 고민 많이 했는데.”


재현이 주먹을 꽉 쥐었다. 피가 거꾸로 솟아 머리에 김이 나는 것 같았다. 


“헉 헉.. 고민?”

“들어봐. 일단 차에 타.”

“너 레아랑 같이 있는 거 아니야? 레아 어딨 어!” 그의 언성은 점점 높아졌다. 

“아이 씨, 그래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하지. 일단 들어 보라니까.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들은 진성의 차에 올라탔다. 아직도 분개하고 있는 재현에게 목마를 텐데 물이나 마시라고 물병을 건네주고 그는 저 멀리 화려한 색으로 바뀌고 있는 전광판을 뚫어지게 보며 드디어 ‘그것’을 말할 순간이 왔다는 듯 차분하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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