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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남 Dec 12. 2023

명품관은 처음이라

재현은 장례식에 와주어서 고맙다며 답례를 하고 싶다고 했다. 오랜만의 그들과 저녁식사를 하고 싶었다. 


동태파악도 할 겸.


“오빠, 나 오늘도 야근이야.”


예상치 못한 대답에 재현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일이 많아 피곤하겠다는 걱정보다 매정한 ‘알았어’가 튀어나오자 레아가 조금 서운해하는 것 같았다. 


재현은 전화를 끊고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바로 진성에게도 전화했는데, “야 어쩌지. 나 오늘 야근이야.”라는 짜고 친 듯한 똑같은 답이 들려왔다.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노트북과 종이들을 주섬주섬 챙기고 진성의 회사로 뛰어갔다. 진성의 회사에 도착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23층이나 올라가는 동안 머릿속에서 빠른 계획을 세웠다. 


만약 진성이 자리에 없으면 바로 레아에게로 가고 아니 어디로든 장소를 알아내서 간 다음, 엉겨 붙고 난리치고 있는 그들을 그의 눈으로 확인한다. 그리고 그 녀석의 아구창을 대차게 날리고 절교 선언을 한 다음 레아를 버릴… 수는 없어 무릎을 꿇고 눈물 흘리며 싹싹 빌 만한 벌을 줄 것이다. 


띵동!


엘리베이터의 도착음이 나자 그는 결연하게 내렸다. 


그리고 침착한 몸의 움직임과 달리 눈은 빠르게 진성을 찾고 있었다. 그가 컴퓨터가 첩첩산중처럼 나열되어 있는 오피스 곳곳을 차근차근 돌아다녔지만 진성은 아무 곳에도 찾을 수 없었다. 마침 지나가는 회사원에게 진성의 자리를 물러 보자 그는 바로 앞에 있는 데스크가 진성의 것이라고 했다. 빈자리였다. 진성은 없었다. 


‘뭐? 씨발. 야근한다고?’



“재현아.”


그가 뒤를 돌아보니 진성이었다. 그는 믹스커피가 담긴 앙증맞게 작은 종이컵을 귀엽게 들고 있었다.


“여기 네가 웬일이야 얼굴은 왜 또 빨개?” 


그가 마시고 있던 믹스커피를 자신의 데스크에 내려놓으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어.. 너 야근… 하니까. 도시락 사다 줄까 했지.”

“니 손에 아무것도 없는데. 도시락 어딨 어?”

“어. 어. 이제 사려고. 나갈래?”

“하하하 야 여기서 보니까 겁나 반갑다. 여기까지 왔는데 내가 사줄게. 나가자. 그렇지 않아도 머리 좀 식히려고 했어.”


그는 재현의 어깨를 툭툭 치며 해맑은 미소로 말했다. 그런 그의 얼굴을 보니 괜한 생각을 했나 싶어 진성에게 미안해졌다. 언제나 그의 편을 들어주던 항상 곁을 지켰던 친구인데 너무 심한 비약을 한 것 같았다. 


그들은 편의점에서 이온 음료수 캔을 경쾌하게 따내며 여름 더위를 식히는 밤바람을 맞았다. 


“미안하다.” 재현은 마음속 깊이 그를 의심했던 것을 사과했지만 이유는 알려 줄 수 없었다. 

“뭐가 이 자식아.”

“그냥 다. 그동안 나 많이 도와줬는데. 너 없이 어떻게 대학도 졸업하고 취직하고 결혼까지 생각할 수 있었나 싶어. 가끔 금전적으로 도와준 것도 그렇고. 뭘 물론, 조금 재수 없을 때도 있었지만 정신적으로 힘이 많이 된다.”

“쯧쯧… 그럴 땐 미안하다가 아니라 고맙다고 하는 거야 븅신아.”


그는 특유의 여유와 유쾌함으로 재현에게 애정을 드러냈다. 진성의 목소리에서는 재현이를 향한 한점 부끄러움도 거짓도 없었다. 적어도 그 순간 재현은 그렇게 느꼈다. 그리고 어쩐 일인지 그의 마음속 응어리가 한순간에 녹아 버렸다. 



재현은 레아와 함께 다이아몬드 반지를 사러 가기로 했다. 레아는 그들의 가난한 처지는 다 좋으니 좋은 반지 하나만 해달라고 했다. 재현은 그런 레아의 마음이 고맙고 사랑스러웠다.


그들은 주하의 추천으로 백화점 명품관으로 들어갔다. 믿을 수 없을 만한 가격대가 즐비한 것을 보고 재현은 살짝 긴장했다. 그는 최대한 당황하지 않으려고 애썼으나 쇼윈도에 전시된 한 반지의 가격을 보고는 결국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그는 가격표에 달려 있는 영을 세고 또 셌다. 


“헉! 1억?”

“하하.. 난 그런 거 아니어도 돼.”

“어.. 어..”


머쓱해진 재현은 레아의 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닐 뿐이었다. 가격 앞에 쫄보가 되지 않으려고 다짐했다. 하지만 처음 보는 가격을 보고 본능적으로 나오는 반응은 그가 생각해도 개판 오 분 전이었다. 


“오빠! 이거 어때?”


재현은 반지의 생김새 보다 가격표에 달린 영의 개수에 집중했다. 그는 긴장했다. 그녀가 손가락에 낀 반짝 거리는 반지를 이리저리 돌려 보고 있는데 이리저리 돌리는 손가락의 향연에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그는 대답 대신 가격표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가 영의 개수를 세며 고개를 까딱까딱하자 점원이 친절히 웃으며 3천만 원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때도 그는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그리고 바로 후회했다. 레아의 표정을 보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1억 보다는 적은 액수였지만 그가 생각한 반지의 예상 가격인 500만 원 보다 훨씬 넘는 액수였다. 오백만 원. 그것도 본인 스스로는 엄청 후하게 맥인 가격이었다.   


그는 점원에게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눈 밑의 볼은 의도치 않게 심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레아는 사뭇 시무룩한 표정이었다. 맞았다. 레아의 씀씀이를 그동안 몰라도 너무 몰랐던 탓일까. 재현은 잠시 바람을 쐬고 싶을 만큼 공기가 답답함을 느꼈다.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

“응.”


그는 명품관을 탈출하다시피 나왔다. 애초에 이런 곳에서는 재현이 바라는 가격이 있을 리 없었다. 그는 황급히 주하에게 전화했다.


“난 태어나서 이런 가격 처음 보는 것 같아. 난… 이런 거 레아한테 못 사줘.”

“워. 워. 목소리 진정하시고.”

“반지 값이 1억이더라? 1억이 말이 돼? 1억?? 물건 하나에? 차도 아니고 집도 아니고.”


재현은 주하에게 다소 원망스러웠다. 


“레아가 고른 반지는 얼만데?”

“삼천만 원.”

“레아가 고른 반지 정도면 엄청 검소한 건데?”

“난.. 그런 돈 없어.”

“너 평상시 레아가 얼마짜리 가방 들고 다니는지 몰랐구나?”

“어?”


재현은 천천히 뒤를 돌아 레아에게 시선을 던졌다. 주하는 그녀 인생에 돈이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던 점을 강조하며 무덤덤하게 말했다. 


“레아 오늘 입고 간 재킷 400만 원, 신발 120만 원, 가방 12000만 원, 원피스 80만 원. 나랑 우정 반지 120만 원, 시계 600만 원. 도합 2500만 원.”


재현은 말없이 전화를 끊었다. 그는 우두커니 서서 백화점 안에 있는 상점들을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푹 숙였다. 


“재현아. 힘들어?”


컨디션이 안 좋아 보이는 재현이 걱정되어 레아가 재현에게 다가왔다. 


“레아야.”

“표정이 안 좋아 보여.”그녀가 걱정하며 재현의 어깨에 작은 손을 살포시 올렸다. 

“어. 미안…. 속이 좀 안 좋네.”

“오늘은 집에 가서 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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