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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남 Dec 13. 2023

그런... 거였어?

띠리링  


햇살이 들이치고 배는 불렀던 오후, 진성이 책상 앞에 앉아 서서히 눈이 감기려고 할 차에 요란한 진동소리와 함께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여보세요.”

“진성 오빠.”

“오, 레아. 결혼 준비는 잘 돼 가? 무슨 일로 전화를 다?”

“나 부탁 좀 들어줘. 라이드 좀 해줘. 재현 오빠에게는 말하지 말고.”

“라이드?”


진성은 의아해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녀와 개인적으로 전화하는 일은 드물었다. 그는 종종 레아의 집까지 바래다주긴 했어도 이런 식의 개인 전화는 처음이었다. 그러나 진성은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녀는 진성에게 회사 끝나는 시간에 맞춰서 자신을 픽업하라고 했다. 진성은 흔쾌히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레아가 진성의 차에 올라탔을 때 진성은 레아에게 평상시와 다른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그녀는 유난히 외모에 신경 쓰고 있었고 또 긴장한 모습이었다. 


“무슨 일 있어?”

“어… 부모님 모임에 가는데 재현 오빠랑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오빠한테 부탁한 거야. 고마워. 앞으로 종종 부탁할게.”

“아니 택시 놔두고 뭐 해?”

“이런 좋은 차 가지고 있는 지인 두고 뭐 해?”

“참나. 하하”

“택시비도 아끼고 좋지.”

“하여튼 있는 집 애들이 더 한다니까.  뭐 매번 장담 못하지만 시간 있으면 언제나 해줄게.”


그녀가 내려 달라고 부탁한 곳은 큰 호텔이었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그녀를 내려 주었으며 그 이후로도 몇 차례 더 라이드를 해줬다. 


진성이 이상한 낌새를 느낀 건 저번주에 해줬던 라이드였다. 그날 유난히 더 신경 쓴 화장과 향수 냄새 그리고 명품으로 치장한 액세서리를 보고도 별 생각이 없었는데 어떤 사람과 전화통화 하고 있는 모습이 좀 수상해 보였다. 그에게 설명할 수 없지만 무언가 중요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촉이 왔다.


“어…네… 네…. 5분 후에 가요. 네.”


네네네 만했는데, 그녀의 목소리에서 여성미가 물씬 풍겼다. 진성은 그녀가 자기의 눈치를 보지 않겠다는 듯, 자연스러운 표정을 억지로 지어 내는 것이 느껴졌고 우수한 청력을 자랑하는 그는 대화상대가 남자인 것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그녀는 통화음을 줄이려 휴대폰을 든 손으로 황급히 눌러 댔다. 휴대폰 속의 그 남자는 아버지라고 하기엔 꽤나 젊은 목소리였다. 그 남자는 그녀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진성은 그녀의 전화 대화를 듣지 않았다는 듯 음악에 맞춰 고개를 까딱 거렸다. 그는 그런 그의 움직임이 더 어색해 보일 수도 있겠다고 스스로 깨달은 뒤 서서히 몸에서 리듬을 탈피시켰다.  


“데려다줘서 고마워 오빠.”

“어, 부모님과 좋은 시간 보내고.”

“어.. 어.”


그는 ‘부모님’을 강조했다. 그녀의 표정이 얼마나 뻔뻔할지 관찰하기 위해서였다. 그녀가 내리자 그는 잠시 핸들 위로 손가락을 몇 번 튕기더니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셜록홈스 두 뺨치는 기질을 발휘해 그녀의 뒤를 밟기로 했다. 


그가 그렇게 하기로 한 건 재현을 위한 일 이라기보다 순전히 그녀가 숨기고 있는 어떤 비밀을 본능적으로 발견해 냈고, 그것에 대한 궁금증이 증폭됐기 때문에 생긴 선천적 오지랖이었다. 


그녀가 내린 장소는 골목길에 있는 맛집이었는데 그녀는 그쪽으로 들어가는가 싶더니 방향을 바꿔 반대쪽 골목으로 향했다. 그녀는 다시 얼마간을 걸어 외제 세단이 길가에 주차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누가 자신을 보기라도 할까 봐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그곳으로 달려갔다. 진성은 그때마다 그가 차 안에 있다는 사실을 잊은 채 고개를 핸들 밑으로  숙이기도 했다. 그녀가 그 고급 세단에 타자마자 그것은 조용히 출발했고 진성도 그 차 뒤를 열심히 밟았다. 


그는 어느새 레아를 쫓으며 추격의 짜릿함 마저 느꼈다. 그녀가 부모님의 차를 탄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 안에서 예상하지 못한 드라마가 신명 나게 펼쳐지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재현에겐 알릴 계획은 아직 없었다. 사실 재현에게 피눈물을 나게 할 여자라면 그 역시도 그녀를 옹호해 줄 생각은 없었다. 그는 의리가 있는 남자였다. 하지만 우선 침착하게 사실을 알아내야 했다. 그들을 따라 도착한 곳은 S 호텔 앞 발레파킹 장소였다.  


레아가 우아함을 몸짓을 만들며 내렸다. 저건 내숭이었다. 뒤이어 내린 사람은 부모님이 아닌 역시 중년의 남성이었다. 진성은 떨리는 마음으로 휴대폰 전화를 꼭 쥐고 있었다. 갑자기 뜨거운 우정의 피가 머리끝까지 돌았다. 


‘감히 네가 재현이를…. 배신해?’


재현에게 알리지 않을 초기의 계획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졌다. 언제라도 재현에게 전화해 열심히 고발할 참이었다. 그리고 재현이 오기 전에 그 남자의 멱살이라도 잡고 한방 날리며 레아는 결혼할 사람이 있다고 목청 것 외칠 수도 있었다. 그러면 겁나 멋지고 의리의 사나이가 되는 것일 수도 있으나… 


쉽사리 손가락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정황을 더 지켜봐야 했다. 그 중년의 남자는 레아의 허리에 팔을 감싸고 누가 봐도 연인인 것처럼 호텔 안을 들어갔다. 


진성은 심란해졌다. 그녀의 배신에 가담한 것 같아 께름칙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당장 전화하지 않았다. 가슴만 쓸데없이 두근거릴 뿐이었다. 


이후로도 레아는 종종 라이드를 부탁했다. 진성은 재현에게 얘기해야 하는데 말 못 하고 있는 이유를 ‘맞지 않는 타이밍’으로 돌렸다. 사실 진성은 재현에게 말하는 것을 두려워 피하고 있었다. 재현이 느낄 배신감은 둘째치고 발견 당시 한 대 때려 주지 못한 미안함과 당장 그에게 고발하지 않았다는 자책감이 그를 주저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재현은 진성의 말을 들으며 진성이 보고 있었던 전광판, 여전히 화려한 색으로 바뀌고 있는 그 전광판을 뚫어져라 볼 뿐이었다. 


“미안하다.”


묵직하게 겨우 한 마디 뱉은 말이었다. 


“뭐가.”

“한 대 때린 거.”

“그럼 너도 맞아.”

“싫어.”


그들은 말없이 한 동안 앉아 있었다. 진성은 차에 시동을 걸고 재현의 집으로 향했다. 재현은 진성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신뢰의 눈빛을 보내며 아까 마신 빈 물병을 진성의 손에 꼭 쥐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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