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이다!
나는 레몬의 냄새가 밀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저 멀리 구석진 곳, 또 다른 코너가 꺾이기 전, 우리가 차마 인지하지 못한 문이 하나 더 있었다. 눈이 동그래진 포는 나를 보며 동의의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나머지 무리들도 마찬가지로 확신했다. 그건 레몬이었다.
레몬! 한순간에 희열이 몰려왔다. 그동안 나를 무시했던 사람들을 곱씹으며 그들의 주장을 초라하게 여겼다.
‘거 보라고! 너희들이 알지도 못하고 했던 말들!’
그 작은 공간에서 누가 더 맞았나 토론했던 날파리들의 치열한 삶이 촌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세련된 줄 착각했던 그들의 가치관은 사실 무지에서 나온 고집에 불과했다.
캬!
무엇보다 마음 한편 씁쓸하게 남아 있던 초와 한의 배신 때문에 더 이상 슬퍼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이 와중에 초가 이 향기를 느끼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조금 아쉽긴 했다. 그녀와 함께 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녀가 신이 나서 행복해하는 모습은 정말 아름다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없다.
왜 그렇게 고민하고 어려워했을까. 그냥 이렇게 나오면 되는 것을! 그 수많은 시간들이 참으로 바보 같고 아까웠다. 맞았다. 우린 신날파리들이었다. 모험가이자 개척자였다. 모험을 하면 보물을 얻는다고 말하신 어른들의 이야기는 결코 틀린 것이 아니었다. 몬스테라를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면 레몬향 이야기를 해줄 생각에 절로 날개가 부르르 떨렸다.
그런데 이건 정말 신기한 경험이었다. 우리 중에 정말 레몬을 먹어보고 냄새를 맡아본 날파리는 한 마리도 없었다. 그런데 우린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것이 레몬이라는 것을.
“레…. 몬이야.”
“그래. 알 수 있어. 이게…. 레몬이라는 걸.”
이것이 트라가 말한 '보면 한눈에 알 수 있어'였다. 그것은 운명과 같은 것이었다.
나는 트라가 한참 동안 부엌에 가는 방법을 말해주고 있을 때를 회상했다. 방향을 말해주는 것까지는 잘 따라가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부엌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졌다.
“그런데 그곳이 부엌인지 부엌이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어?”
“하하하…”
“왜 웃어?”
“그야….”
그는 나의 진지한 표정을 보자 해맑은 웃음기를 거두어 냈다. 부엌의 존재조차 의심했던 우리로서는 당연히 할 법한 질문이었다는 걸 그제야 깨닫는 듯했다.
“무조건 알 수 있어.”트라가 여유 있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 표정이 너무 확신에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불안했던 마음은 조금 안정이 되었지만 여전히 궁금했다. 나는 만에 하나 다를 수 있는 상황에 대비해 모든 질문을 할 작정이었다.
“어떻게?”
“너의 더듬이가 반응할 거야.” 그가 길게 뻗어 있는 그의 더듬이를 발로 툭 건드리며 말했다.
“만약 내 더듬이가 모른다면?”
“그럼 넌…”
트라의 더듬이는 멋지고 건강해 바로 알아챌 수 있다 치자. 그렇다면 나의 더듬이는? 나는 나의 더듬이를 의심했다. 설마 내 더듬이가 레몬을 못 느끼면 어떡하지. 레몬의 향기를 못 알아채고 지나쳐 버리면 어떡하지. 걱정할 땐 늘 세밀하고 확정적이었다.
“그럼? 그러면 난… 그냥 레몬을 지나칠 수도 있다는 소리야?!”
나의 목소리는 사뭇 신경질조였다.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가슴이 두근거렸다. 레몬을 보지도 못했지만 알아보지 못할 것 같은 생각에 벌써부터 속상했기 때문이었을까. 서러운 마음이 엄습할 즈음,
“하하하하. 그러면 넌, 날파리가 아니지.”
“터… 무.. 뭐?”
뭐라? 날파리가 아니라고? 명쾌한 그의 대답에 불안감은 감쪽같이 없어졌다. 그렇게 증발해 버린 불안감에 허탈한 나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난 날파리인 게 확실하고. 그렇다면 레몬의 향기는 알아채지 못하는 게 힘들다는 얘기? 트라는 우리가 사전 정보 없이도 부엌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곳의 신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건 날파리니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그랬다. 아니나 다를까 트라가 말한 그 냄새에 우리 모두의 더듬이가 반응하고 있었다. 그 향긋하고 시큼한 냄새는 우리를 각성시켰다. 나는 전에 없는 흥분을 했다. 하지만 최대한 널뛰지 않고 고요하게 맞이하려고 애썼다. 우리는 레몬의 냄새를 따라 물 흐르듯 날아갔다. 그 향기는 상큼하기도 쓰기도 했으며 차갑기도 하고 따뜻하기도 했다. 우리는 어딘가에 홀린 듯 모두 말없이 비행만 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방향감각마저 상실한 채 몸을 기류에 맡겼다. 향기는 더 짙어졌다. 레몬의 상큼함과 함께 난생처음 맡아보는 씁쓸한 향이었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좋았다. 나의 정신은 어딘가 모르게 몽롱해졌다.
‘이렇게 좋은 거였다고.’
기분 좋은 나른함이 계속되면서 다리를 축 늘어뜨렸다. 어느덧 날갯짓은 더디어지고 눈앞에는 부연 안개가 자욱했다.
‘그런데… 여긴 어디지? 앞이 안 보여.’
“탄!”
포의 목소리. 칼로 찌르듯 불쾌했지만 그 바람에 나는 몸을 후르르 떨었다. 눈을 뜬 상태. 깊은 잠에서 깨어난 듯 여전히 혼미했다. 그리고 왠지 나는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동안 숨을 쉬지 않고 있었던 것 일가?
“포…. 어떻게 된 거지? 다들 어디 갔어?”
“일단 피… 피해!”
포는 다짜고짜 나를 잡고 문 위로 올라갔다. 포의 날갯짓은 느렸지만 다급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혼신을 다해 나를 구하려고 하는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그 사이에도 눈이 감기고 있었다.
“타.. 탄! 정신 차려!”
또 한 번의 괴성. 포는 나를 구하고 싶어 했다. 정신 차리라는 말이, 그의 괴물 같은 목청이 지금 황홀한 이 순간 어울리지 않아서 나는 조금 신경질이 났다.
찰싹!
그가 어딘가 위로 겨우 나를 올려 냈을 때 나의 얼굴을 휘갈겼다. 나는 그제야 기침을 쏟아냈고 몰아치는 호흡을 진정시켜야 했다. 처음으로 느낀 호흡 곤란이었다.
이런… 몸이 마비되고 있었어. 우리가 앉아 있었던 곳은 문위였고 나는 포 옆에서 한참 동안 숨을 몰아셨다.
“어떻게 된 거지?”
“우.. 우우리 무.. 무리가… 다…”
포가 숨을 헐떡이며 말하는 사이 나의 시선은 바닥으로 향했는데 나는 믿을 수 없는 장면을 보고야 말았다. 나는 처음에 그것이 작은 씨앗이 흩뿌려진 줄 알았다. 자세히 보니 그 씨앗들에겐 날개가 있었고 더 자세히 보니 날개 달린 씨앗들은 바로 우리들의 동료였다. 그들은 모두 배를 드러내고 움직임이 없이 누워있었다. 상황이 판단이 되지 않았다. 나는 빠르게 고개만 허우적거릴 뿐이었다.
“다….”
“주.. 주 죽었어.”
죽었다고...? 우리... 레몬을 향해 가고 있었던 것 아니었나?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나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축축한 습도, 서재보다 좁고 어두운 실내. 도무지 여기가 무엇을 하는 곳인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부엌이 아님을 알았다. 나는 공포에 가득 찬 포의 눈과 다시 마주쳤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떨리는 더듬이와 날갯짓을 느끼며.
“웰컴 투 화장실!”
천연한 목소리. 아무런 비통도 위로도 없는 태연한 외침. 나와 포는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우리보다 몸짓이 작지만 나이는 더 많아 보이는 아저씨였다. 우리 무리와 약간 다르게 생겼지만 그도 날파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트라와는 또 다른 종족 같았다. 몸집이 작고 마른 편 그리고 검은색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의 목소리처럼 사뭇 편안한 움직임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우리가 인사하려고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려고 하자 그는 앉아 있으라는 듯 손짓했다. 그는 우리를 보고 바닥에 처참하게 버려진 무리들을 한 번 내려다보더니 대뜸 말했다.
“맞으셨군요.”
“…네?”
우리의 사건이 별것 아니라는 듯이 가볍게 내 던지는 말투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우리를 조금 무시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그쪽도 처음이에요? 배신?”
“배신이라뇨? 우리 중에 누가 배신을 하기라도 했다 이겁니까?”
“하하하… 많이 아프시죠? 숨쉬기 힘들고?”
이 자식. 명확한 대답은 없고 능글맞은 질문만 계속한다. 그리고 계속되는 저 뻔뻔한 표정은 슬슬 나의 신경을 긁을 것 같다.
“우리 무리가 거의 죽었어요. 사태가 심각한 거 안 보여요?”
“음. 네 알죠.”
“우리가 우리도 모르는 전쟁이라도 한 겁니까? 배신이라는 소리는 뭡니까!”
그의 담담한 대답이 계속되자 나의 질문은 이제 격노했다.
“워. 워. 화내지 마시고.”
그는 우리를 부축이며 물방울 하나를 건넸다.
“전쟁은 없었어요. 배신만 있었을 뿐.”
“…?”
“봐요. 우리 쪽 날파리도 더러 죽었는걸요.”
그는 반대편 바닥을 가리키며 그깟 무리의 죽음은 일상이라는 듯 말했다.
“그럼 누가 배신 했다는 거요?”
“레몬.”
“레몬?”
나는 포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그 녀석의 허탈한 표정을 보자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벌떡 일어나 떨리는 다리를 끌고 그에게 돌진해 그를 잡고 넘어뜨렸다. 그리고 그의 목을 누르며 말했다.
“뭔 소리야! 레몬이 뭘 배신했다는 거야. 지금 말장난하는 거면 죽여버릴 수도 있어. 내 무리가 모두 죽은 이상 내가 눈에 뵈는 게 없거든. 레몬이 우리를 죽이기라도 한단 말이야!?”나는 부르르 몸을 떨며 그를 눌렀다. 정말 그를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컥… 컥.. 이거 놔야 말을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