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자마자 나는 몬스테라와 짧은 이별인사를 했다. 그리고 포가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나는 마음을 다시 잡고 포를 설득해 바로 부엌으로 향할 작정이었다. 한도 배신하는 마당에 무리들이라고 별 수 있을까. 만약 포도 나와 함께 하지 않겠다고 하면 혼자라도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기지에는 어제의 여파였는지 거의 모든 날파리들이 떠나고 없었다. 트라의 죽음이 공포로 다가왔고 안 좋은 소문은 일파만파 퍼졌던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남아 있는 날파리는 포를 포함해 27마리. 어쩌면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포는 나를 보자마자 달려와 안아 주었다.
“하… 한이 그… 그렇게 도… 됐다는 소… 소식을 드… 드… 들었어.” 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가슴이 내려앉았다.
“괘… 괜찮아?”
“응. 고마워 포. 끝까지 내 곁을 지켜줘서. 고마워.”나는 한 단어 한 단어 꼭꼭 눌러 말했다. 정말 눈물이 날 만큼 고마웠다.
“다다다 다다… 당연하지.”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부둥켜안았다. 많은 무리들의 지지를 받지 못한 것은 어려움도 아니었다. 초와 한의 배신이 나를 더 힘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좌절의 감정에 잠식되지 않으려면 난 움직여야 했다. 나는 몸을 돌이켜 나머지 무리들을 향해 말했다. 부엌이 있다는 건 분명해졌고 우리는 그냥 출발하면 되었다.
“갑시다.”
짧은 나의 한 마디에 결의에 찬 표정을 한 동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히 보니 27마리 중에 유난히 작은 날파리가 있었는데 와류와 바람의 차이점을 물어봤었던 그 꼬마 아이였다.
“너…. 정말 용감하구나.”
“탄과 함께 레몬을 먹으러 갈 거예요!” 카랑카랑 울리는 그의 목소리가 전투력을 상승시키는 듯했다.
“나도 너와 함께하게 되어서 기뻐.”
간단한 준비가 끝났다. 포가 나의 옆에서 준비됐다는 의미의 윙크표시를 해주자 나도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응답했다. 그리고 힘껏 발을 굴러 최대한 높이 날았다. 비행은 산뜻했다. 저 멀리서 초가 눈물을 훔치며 우리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나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나는 최대한 매정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물에 요동하지 않았다. 언젠가 레몬을 가지고 돌아와 '너의 생각은 틀렸다'라고 복수해 줄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그 찰나에 난 그 어떤 희열감에 몸서리를 쳤다.
‘레몬은 정말 있다고.’
시각은 이른 새벽, 살짝 찬 기운이 나는 공기를 가로지르며 서재의 문으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처음으로 우리의 기지국으로부터 제일 멀리 날아왔음을 느꼈다. 그리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문에 도달했다. 자신감이 생겼다.
‘별거 아니었네.’
이 정도 거리로 그토록 주저했다니 참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냥 날아오면 될 것을. 잠시 벽에 붙어 쉬면서 이제는 작아진, 창가에 있는 몬스테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제는 거의 보이지 않는 기지국과, 검은 책이 몰려 있는 회의실을 보았다. 거대했던 그것들은 이곳에서 보니 아주 작은 것들이었다. 심장은 빠르게 뛰고 나의 마음은 환희로 가득 찼다. 시작이 좋았다.
“문이 닫혀 있는데요?”
동료가 외쳤다. 맞다. 문을 통과해야 한다. 작아진 몬스테라를 보며 감상에 젖을 때가 아니다. 문은 원래 주로 닫혀 있었다. 하지만 언제 열릴지 감이 오질 않았다. 나는 문 틈 사이를 엿보았지만 끝이 없을 것 같은 검은 공간만 있을 뿐이었다. 만약 문이 열린다면 열리고 닫히는 짧은 시간 동안 굉장히 빠른 속도로 비상해 뾰족한 모양의 턴을 해야 문 밖으로 코너를 돌 수 있다. 우리 모두, 그러니까 27마리가 동시에 그렇게 해야 한다. 이래저래 작전을 세우고도 한 참이 지났다. 그리고 그 후로도 얼마간에 시간이 지났는데 문이 열리지 않자 우리 모두는 조금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여기서 날 새겠는데?”
나이가 가장 많은 백이 말했다. 사기가 저하될 즈음, 잠깐 쉬어야 하나… 판단이 잘 서지 않았을 때 날개가 뜯겨 나갈 것 같은 거센 바람이 불었다. 엄청난 공기의 와류와 함께 문이 열린 것이다. 그리고 뒤이어 다시 바람이 불어왔다.
“지금이야!”
문이 닫히기 전에 모든 무리들이 문 밖을 나가야 한다! 떨리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문틀을 박차고 날았다. 90도의 뾰족한 턴을 하려는데 문이 다시 닫히고 있었다. 이제 공기의 와류는 아까와 반대 방향, 그러니까 우리가 가려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우리는 전속력을 다해 날았고 공기의 흐름은 우리가 더 빨리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었다. 드디어 문이 닫히고….
서재를 탈출했다! 눈을 빠르게 굴려 멤버 수를 확인했다. 스물다섯, 스물여섯,.... 스물일곱!
‘얏호!!!’
우리 모두는 조용히 쾌재를 불렀다. 엄청난 속도였다. 처음으로 느낀 속도감에 감정이 벅차올랐다. 다른 날파리들도 스스로 감격하는 눈치였다. 우리는 서서히 속도를 줄이며 공간을 파악했다. 문 밖에는 넓은 복도가 길게 뻗어 있었다. 깨끗하고 고요했다. 이 역사적인 순간을 기억하고 싶었다. 이곳에 있는 장면들을 꼼꼼히 기억해 두기 위해 주위를 최대한 살펴보았다. 오른쪽을 바라보니 몬스테라보다 두 배는 더 커 보이는 식물이 있었고 (몬스테라와 다르게 생겼다.) 왼쪽 벽에는 커다란 액자가 줄지어 걸려 있었다. 우리는 잠시 액자 틀 위에 앉아서 숨을 골랐다.
“아주 조용하 군요.”
백이 속삭이며 말했다. 침묵에 압도당했는지 그의 목소리도 덩달아 조용해졌다.
"속삭일 필요는 없어. 하하하."
우리는 두리번두리번거렸다. 이제부터 정말 우리의 감각만을 활용해서 부엌을 찾아 나서야 한다.
“우리가 앉아 있는 벽 쪽 끝에 또 다른 문이 보입니다. 그곳이 궁금하긴 한데 부엌인지 아닌지 둘러보는 것으로 합시다.”
“네!”
생각보다 가까운 위치에 부엌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정하긴 아직 이르다. 트라는 우리가 부엌을 단 번에 알아볼 것이라고 했다. 온갖 음식 냄새가 나서 멀리서도 나서 날파리라면 모를 수가 없다고 했다. 나는 뒤돌아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어떤 이는 얼떨떨한 표정을 어떤 이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나의 포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런….
“이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어요! 우리에겐 앞으로 가는 것뿐입니다!”
나는 힘껏 날갯짓을 하며 외쳤다. 우리는 조금 더 힘차게 날았다. 우리의 흥분은 한동안 계속 됐다. 나는 서재와 조금 다른 공기의 냄새를 느꼈다. 조금 더 차갑고 무거운 느낌의 공기. 나쁘지 않은 느낌이었다. 처음으로 겪는 바깥세상은 충격과 놀라움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잔잔했다. 아직까지 모든 느낌은 서재의 연장선상이었다. 멀리 보였던 문에 생각보다 빨리 도착하자 놀랐고 우리는 생각보다 빠른 우리의 비행 속도에 감탄했다. 걱정했던 모든 것들이 별거 아니었다.
복도 반쯤 건너왔을 때 서재와 같은 모양의 문이 있었다. 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나와 무리들은 아주 조심히 들어가 보았다. 그곳엔 따뜻한 햇빛이 창문에서 들이치고 있었다. 그런데 그곳은 우리가 있었던 곳보다 더 작은 공간이었다. 적은 양의 책과 작은 책상이 있었다. 게다가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는 척박한 땅의 느낌이 났다. 우리는 재빨리 우회하며 방을 빠져나왔다. 인간이 오기 전까지 탐색을 끝내는 것이 안전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시 복도로 나왔고 서재와 반대방향으로 다시 날았다. 그리고 복도 끝에서 오른쪽으로 코너를 돌자 약간 어두컴컴했던 복도가 돌연 환해졌다. 아니나 다를까 높은 천장에 달린 커다란 창문으로 많은 양의 햇살이 내리쳤다. 그리고 아래로는 손잡이가 달린 계단이 보였다. 많은 양의 빛에 당황했는지 우리는 순간 어느 방향으로 갈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나는 높은 개방감에 천장을 한 없이 바라보면서 솟구쳐 날아오르고 싶은 욕구를 겨우 참고 있었다. 우리는 계단 손잡이에 앉아 이곳이 어딘지 파악부터 하기로 했다. 여전히 복도가 있고, 벽에는 많은 그림이, 그리고 높은 천장이 있는 곳에는 위아래로 이어져 있는 계단이 있었다. 우린 아직 부엌을 못 찾고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까.
“계단을 내려가 볼까요?”
누군가 확신에 차서 말했다.
“이곳에는 부엌이 없어 보입니다. 우리가 나온 서재와 그리고 이 방인데 이 방도 우리가 있었던 곳과 별 다를 것이 없어 보입니다. 음식 냄새는 전혀 나지 않고요. 분명 부엌이 아닙니다.”
모두 이 말에 동의했다.
그때였다. 시원하고 향긋한 공기가 오른쪽에서 한 순간에 밀려왔다.
분명 알 수 있었다. 처음 맡아보는 향기. 본능적으로 이것은 레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