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나의 두 발이 중심을 잃고 허우적 대며 민정우를 향해 날아갔다.
척!
더러는 넘어졌고 더러는 버텼다. 그런데 난? 왜 잘 서 있지? 아니 대롱대롱 가방에 매달렸다. 눈치 없는 누군가 뒤에서 나의 가방을 친히 잡고 계신다.
“유나야 괜찮아?”
덩치가 산만한 어떤 남자애가 나의 책가방을 잡았다. 그 남자 애, 눈치 없는 애, 등치가 산만한 애, 장수혁. 우리 반이다. 그는 내가 넘어질까 봐 내 책가방을 잡았으리라. 제길.
“어….”
운전기사 아저씨는 갑자기 노인네 한 분이 차도로 걸어 나와서 급정지를 하게 되었다고 설명하셨다. 노인도 괜찮고 버스 안에 다친 승객도 없었다. 그리고 버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출발했다. 나는 신경질이 났다. 장수혁 이 자식이 언제 나타난 거지?
“넘어질까 봐 붙잡는다고 잡은 게 가방이네. 하하하.”
그는 내 가방을 슬며시 놓으며 말했다. 여드름 때문에 울퉁불퉁해진 얼굴이 미소로 더 울퉁불퉁해졌다. 설명하지 않아도 돼 이 자식아. 네가 허튼짓하느라 난 민정우 근처에도 못 갔단 말이다! 그리고 웬 관심? 내가 넘어지든 말든! 나는 속으로만 씩씩댔다.
그리고 애써 수혁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자 그는 왠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으웩.
“오오오오오. 김유나, 장수혁이 살렸네?”
리드미컬하면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잠깐을 캐치하다니 놀라워라. 왠지 놀리는 투의 목소리에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민정우 옆에 서 있던 친구다. 그러고 보니 저 자식, 민정우만 졸졸 따라다니잖아?
“야 김유나, 장수혁한테 밥 한 번 쏴!”
낄낄 거리는 그의 주둥이를 잡아 비틀어 버리고 싶었다. 그의 입술은 꽤나 두꺼워서 잘 잡힐 것 같았다.
“뭐래.”
난 민정우를 힐끗 보았지만 민정우는 이 대화에 관심이 없는지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그러자 나는 더 치욕스러워졌다.
“야, 야, 수혁이는 얼굴 빨개졌잖아! 우헤헤헤헤헤헤!”그는 나의 팔을 툭툭 쳐가며 말했다. 지 얼굴이 더 빨개지는구먼 흥분해서는. 뭐가 좋다고. 쯧.
“자 이제 그만.”
나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내가 정색을 하자 그가 무언가 말을 하려다 말고 내 뒤를 한 번 보더니 돌아섰다. 나도 덩달아 뒤를 쳐다보았는데 장수혁이 위협적인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잇. 편들어 주지 않아도 된다고.
우르르 쾅쾅 우리는 학교 앞에서 내렸다. 나는 신경질이 났다. 민정우와 얽혀도 기분 나쁠 조롱인데 여드름쟁이 장수혁?
난 땅만 쳐다보며 교실로 향했다.
2교시 영어가 끝난 후 나는 어느덧 장수혁과 애인 사이가 되어 있었다. 도대체 왜? 뭐 이런 개떡 같은 상황이 다 있나 싶지만 저놈의 유치한 남자새끼들은 그런 말 만들기를 참 좋아한다. 심심한 인생들에게 내가 때 아닌 별미를 준 게 분명하다. 분명 장수혁 잘못이 아닌걸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나 다치지 말라고 도와주던 그 행위가 센스 없고 눈치 없었으며… 또 센스 없었다고 생각이 들자 그를 꼬집어 주고 싶었다.
소문에 대한 나의 심드렁한 반응이 계속되자 그 이상한 소문은 차츰 애인사이에서 장수혁이 날 좋아한다는 것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팔을 툭툭 치던 이름도 모르는 그 남자애는 우리 반까지 와서 친히 소문을 정정해 주었다. “야 장수혁이 너 좋아한데.”그리고 키득키득 웃으며 사라졌다. 그건 나쁘지 않았다. 물론 장수혁이 좋은 건 아니지만 누군가에게 관심을 받는다는 건 괜찮았다. 소문에서 벗어난 기념으로 그와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해 보고 싶었다.
“수학 문제 다 풀었어?”
“어…. 어.”
“나 좀 보여줘.”
“여… 여기.”
그는 왠지 떨고 있었다. 정말 나를 좋아하나? 상관없었다. 나의 감정은 민정우에게 가 있으니까. 그런데 이 녀석, 생각해 보니 소문만 나를 좋아한다 뿐이지 공식적으로 나에게 고백한 적도 없었다. 나는 그의 소심함을 조롱하면서도 은근히 아쉬워했다. 아쉬워한 건 그가 나에게 고백해 주길 바라서가 아니라 나를 좋아하는 남자라면 용기가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에서 생긴 감정일 것이다. 실제로 그가 고백을 한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그를 발로 차버릴지도 모른다.
수혁이에게 수학 숙제를 베껴 쓰고 점심시간이 여유 있어지자 나는 예나와 수진이와 매점에서 산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운동장 계단에 앉았다. 민정우가 점심시간만 되면 그곳에서 축구를 하기 때문이다. 민정우를 볼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기도 하다.
수빈이는 우리보다 외모도 생각도 원숙미가 흐르는 아이이다. 그녀는 나와 예나가 궁금해할 만한 이야기들을 서슴없이 해주었다. 대부분 성에 관한 것이었다. 그녀의 엄마는 산부인과 의사신데 우연히 엄마 서재에서 해부학 책을 발견했고 어쩌다 보니 정독하게 되는 일이 있었다고 했다. 그녀의 말이 어쩔 땐 앞 뒤가 맞는 것 같아 보이진 않았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그 소재로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신이 나는 일이었다. 어느 날 수진이는 해부학 책에서 ‘음모’라는 단어를 발견하고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 준 적이 있다. 예나는 해맑게 “남자들은 꾀가 많아서 그런가?”라고 큰 목소리로 내뱉었고 우리는 이중적 의미가 있는 그 매혹적인 낱말에 배가 아프도록 웃었던 적이 있다.
우리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아무 말 없이 축구하고 있는 남학생들을 지켜보았다. 아니 민정우를 보았다. 민정우는 다른 학생들을 재치는 스킬도 슛을 하는 발차기도, 다 멋있었다. 먼저 아이스크림을 다 먹은 수빈이가 대뜸 남학생들을 향해, 그러나 우리만 들릴 정도로 아주 작게,
“음모 있는 자식들.”
이라고 말했다. 그녀의 노려보는 눈매는 비장했고 올라간 입꼬리는 짓궂었으며 팔짱 낀 자세는 용감했다. 나와 예나는 아이스크림을 바닥에 떨어뜨릴 정도로 깔깔 웃어댔다. 도덕 선생님이 “어이구… 느그들 나이에는 굴러가는 낙엽에도 웃는다더니.”라고 한 마디 하시고 지나가셨다.
그런 도덕 선생님 말에 우리는 또 한바탕 숨이 넘어가도록 웃었다. “낙엽이 왜 웃겨?”예나가 숨이 찬 목소리로 말하자 난 다시 한번 웃었다. 나는 수빈이와 예나가 너무 좋았다.
“그런데… 민정우도…”
“어우 야!”
나와 예나는 수빈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발칙한 전개는 상상도 하기 싫었다. 나는 왜 남자들은 저 더운 데서 축구를 할까. 더운데 고생도 많다. 하면서 쓸데없는 걱정으로 이 요상한 생각을 무마시켰다. 우리는 교실로 올라가는 동안에도 민정우 얘기를 했다. 그가 어느 반 여자한테 고백을 받았다더라 그런데 거절했다더라였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그녀의 용기에 놀랐다가 거절한 정우 얘기에 안도하며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거절당한 여자에게는 ‘꼴좋다’라며 우리끼리 마녀사냥을 했다.
그러다 문득, 나는 민정우가 뭐라고 하루종일 그 아이 말만 할까 싶었다. 하물며 나는 엄마에게도 민정우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엄마는 자기 딸이 제일 소중한지라 민정우에게 속 태우는 나를 자존심 상해하셨다. 하지만 엄마도 민정우 이야기가 아니면 나와 대화할 거리가 없다는 판단이 생겼는지 이래 저래 그러니 저러니만 하셨지 나쁜 말은 별로 안 하셨다.
“예나랑 수빈이도 민정우 좋아하디?”
“응.”
나는 엄마가 간식으로 내어 준 만두를 집어 먹으며 아무 생각 없이 대답했다.
“그러다 싸움 난다! 친구가 적이 되겠네.”
헉. 예리하다. 역시 엄마는 다르다. 엄마의 시각은 달랐다. 게다가 엄마 말은 틀린 게 없다! 왜 그 생각을 못했지? 나는 조금 혼란스러웠지만 갑자기’ 우리 셋 중 정말 누구 하나라도 민정우랑 사귀는 날이 오기나 하겠어?’라는 부정적인 생각에 잠시 안심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무래도 그 셋 중에 사귄다면 민정우는 내가 사귈 것 같았다. 갑자기 걱정에 휩싸였다. 의리가 있지 어떻게 그 둘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 있을까. 그들은 나의 베스트 프랜드 아닌가!! 나는 갑자기 수빈이의 마음이 찢어질까 봐, 혹은 예나의 마음이 속상해할까 봐 상심이 컸다. 그리고 돌연 드라마 찍는 연기자들처럼 몰입하게 되더니 만두를 다 씹어 넘기지도 않은 채 훌쩍 거리며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아히고, 꼴값 떨고 있네.”
엄마가 부엌 정리를 하며 나를 비웃었다. 그 바람에 눈물은 쏙 들어갔지만. 나는 방안으로 쏙 들어가 침대로 점프한 다음 이불을 덮고 마저 울었다. 그 눈물은 너무 서러워서 통곡으로 이어졌다. 엄마는 누구 하나 죽어서 그런 눈물이 나오는 것이냐며 또 웃었다. 나를 신기해하는 것 같았다. 해 질 녘 즈음 나는 숙제를 하다가 ‘내가 왜 울었지?’ 생각했다. 그것은 알 수 없는 눈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