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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남 Oct 01. 2024

초록담벼락은 죄가 없지

우리 반의 우승은 사실 장수혁의 우승이었다. 그는 수비며 공격이며 못하는 것이 없이 그야말로 전천후였다. 우리 반 남자애들은 자신의 일인냥 승리에 만끽했고 여기저기서 수혁이에게‘네 덕분에 이겼다.’라는 말을 했다. 그럴 때마다 수혁이는 모든 영광을 나에게 돌리겠다는 것처럼 나를 쳐다보곤 했다. 그럼 나는 재빨리 눈을 피했고 읽지도 않은 책을 본다든지 샤프심을 정리한다든지 했다. 


지금 쯤 민정우의 기분은 어떨까 궁금했다. 나와 수빈이와 예나는 약속이라도 한 듯 1반으로 향했다. 우리는 성공으로 들뜬 우리 반 남학생들의 거친 저음소리에서 탈출했다.  

우리는 민정우가 설마 ‘패배감에 빠져 있진 않을까, 반 분위기도 안 좋은데 괜히 자신 때문에 진 경기라는 죄책감을 가진 건 아닌지’라는 등의 걱정을 했다. 나의 걸음은 그런 걱정과 달리 다소 경쾌했다. 예나와 수빈이에게 나는 구구절절 그가 걱정된다고 했지만 사실 우수에 찬 눈빛이 얼마나 애달프고 잘생겼을까가 더 궁금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잘생긴 아이의 슬픈 모습이 더 궁금했다.  

 그를 만날 수도 있다는 기대감은 1반으로 가까워질수록 1사분면의 이차 방정식 곡선을 그리며 상승했다. 우리 셋은 점점 말이 없어졌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나의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는데, 


“우리 또 보네? 자주 본다. 그때 음료수 고마워.”생각보다 밝은 목소리. 민정우다. 

“엇? 어! 하하 여. 기. 서. 보. 네.”


나는 민정우를 만난 건 내 인생에 의외의 사건이라는 듯, 너를 보러 가고 있었던 것이 정말 아니었다는 듯 목소리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난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잘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빈이가 민정우의 뒤에서 두 손을 위로 올렸다가 내리길 반복했다. 진정하라는 의미일 것 같다. 나는 그 메시지에 바로 수긍하고는 뭔가 따분하다는 듯 크게 한숨을 내뱉으며 더 이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넌 여기 왜 있어?”

“여기 우리 반 앞이야. 넌?”


어 그렇지. 여긴 1반이지. 내가 우수에 찬 민정우의 얼굴을 보러 여기까지 왔었지. 


“하하하. 너 1반이었어?”


나는 아주 큰 목소리로 놀라는 척을 했다. 예나는 옆에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뭔가 잘못된 것 같다. 

“어. 넌 몇 반이야?”

“나… 나? 난 7반… 인데. 저어어 쪽 보건실 가느라. 1반을 굳이 지나치네? 예나가 좀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다고 해서. 하하하.”


콜록콜록.


친절하고 착한 예나가 센스 있게 기침 연기를 했는데 수빈이는 ‘ㅅ’ 자 눈썹을 만들며 쓴 미소를 지었다. 모든 것이 망한 것 같았다. 더 어색해지기 전에 이 자리를 떠나야 한다. 하지만 내 앞에 있는 민정우를 먼저 등진다는 것이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 나는 바보처럼 몸을 이리 틀었다 저리 틀었다 하다가 뒤를 돌았다.


“네가 유나야?”


민정우가 가려던 나의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내 이름을 안다고? 이게 무슨 일이래? 나한테 관심 있어서 뒷조사라도 한 건가? 너도 날 짝사랑?! 나는 몸을 다시 획 돌리고 머리카락을 셋째 넷째 손가락을 이용해 귀 뒤로 넘겼다. 


“어. 어떻게 알았어?”

“이름표 보고 알았지.”


아. 나는 그의 대답에 살짝 당황했지만 그는 사실 나를 좋아하고 있고, 그래서 말을 걸었고 이름은 원래 알고 있었지만 민망해서 둘러댄 것 같은 생각에 다시 자신감이 생겼다. 그래서 나는 그의 이름표를 응시하고는, 


“어 그래 넌 민정우구나.”를 아주 새침하게 말했다. 

“응. 잘 가.”

“어?”

“보건실 간다며.”

“아. 어.”

그는 또 찬란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자신의 반 안으로 슝 들어갔다. 이런. 마지막엔 너무 새침하게 굴었나 싶어 후회했지만 때마침 수업 시작종이 울렸다. 우리는 당연하게 보건실 쪽이 아닌 7반으로 뛰어갔다. 


“야야야. 민정우랑 대화했어. 대화. 너 이름도 알고! 웬일이야 웬일이야!”

“웬일이야 웬일이야!”

수빈이와 예나가 호들갑을 떨었다. 난 상기된 얼굴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뭐야! 경기에서 지고도 괜찮네? 멘탈 갑!”


예나는 민정우 칭찬을 하기 시작했고 수빈이도 맞장구를 쳤다. 뒤이어 바로 시작한 역사 수업시간은 집중을 못하고 통으로 날렸다. 민정우와 데이트하는 상상으로 머리가 가득 찼기 때문이다. 그가 나의 이름을 말했다. 난 너무 황홀한 나머지 점심밥도 다 먹지 못했다.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아니 내 이름을 굳이 왜 물어봐? 왜 물어보냐고! 참나. 나는 어쩌면 정말로 민정우와 사귈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내내 들떠 있었다. 이렇게 된 김에 나는 좀 더 적극적으로 표현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침에 버스 정류장에서 한 번 더 말을 걸어보고 싶었다. 그리고 상황이 더 괜찮으면 핸드폰 번호도 알아내고 싶었다. 그런데 어떻게 하지? 나는 아침마다 꽃단장을 했고 사촌언니가 쓰다가 버리고 간 향수도 톡톡 털어 옷 위에 발랐다. 정류장으로 가는 길 담벼락에 그렇게 예쁜 장미가 흐트러지게 피어 있었는지 처음 알았다. 나는 마을버스 10번을 타기 위해 줄을 섰다. 얼마 되지 않아 민정우도 도착했다. 뒤돌아서 인사하고 싶었지만 그놈에 고개는 돌아가지 않았다. 나는 뒤돌아 보면 누가 때리기라도 할까 봐 철두철미하게 앞만 쳐다보았다. 내가 인사를 먼저 하기 전에 그가 나에게 아는 척을 해줬으면 하는 바람으로 주문을 외웠다. ‘아는 척해줘 아는 척해줘.’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우리는 정류장에서 만났지만 대화하지 않았다. 내가 너무 줄 앞쪽에 서 있거나 그가 이미 저 멀리 앞쪽에 서 있어서 얼굴조차 볼 수 없었다. 나는 하루하루 지날 때마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가 나의 이름을 부른 그날 이후로 별다른 진전이 없자 나는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아니 실망에 더 가깝다. 그가 날 좋아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메타 인지를 시도해 보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날이 지날수록 나는 그렇게 그와 대화하지 못하는 것에 좌절감만 느낄 뿐이었다. 그러다 이제는 아예 포기해 버렸다. 그리고 그가 내 이름을 말한 그 핑크빛 날은 아주 옛날이 되어 없어져버린 것 같았다. 그러는 사이 담벼락 장미 잎도 다 떨어져 무성한 초록잎만 싱그럽게 남았다.

나는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면서 새삼 장미가 없는 초록 담벼락이 더 예쁘다고 생각했다. 햇살은 뜨거워졌지만 여전히 찬기운을 내뱉는 시멘트 바닥과 초록잎이 날 설레게 했다. 그때였다. 저 멀리서 민정우가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때아닌 용기를 내어 그에게 담벼락 얘기를 해볼까 싶어 완전히 뒤돌아섰다. 그런데 그가 나의 용기를 알아채기라도 한 듯 그 찬란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손을 흔드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의 얼굴을 100년 만에 보는 것 같았다. 그의 미소는 여전히 담벼락 푸른 잎처럼 싱그러웠으며 그의 넓은 어깨는 시멘트처럼 견고했다. 그가 이제는 속도를 내어 뛰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이 찰랑이며 뒤로 넘어가는 바람에 훤칠한 이마를 드러내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나도 손을 흔들어 화답하고 싶었다. 나는 손을 수줍게 배까지 올리고는 그냥 멍하니 힘차게 뛰어 오는 그를, 그림 같이 달려오는 그를 슬로우 모션으로 관찰할 뿐이었다. 그 수많은 시간, 내가 말하지 못하고 지나간 그 안타까움과 실망의 연속의 고리가 드디어 깨어지는 것일까! 

나는 그가 빠른 속도로 다섯 걸음 앞까지 도달하자 환한 미소로 답했다.


“안….”

그런데 그는 내 앞에 멈추지 않았다. 그는 내 뒤에 뒤에 뒤에 있는 키 큰 여자 아이에게 달려갔다. 그는 달려오느라 지쳤는지 잠시 두 손으로 무릎을 잡고 숨을 고르고 있었는데 그 여자애가 휴지를 꺼내어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아 내주었다! 그 찰랑 거리는 머리카락을 아주 친밀하게 쓸어 올리기까지.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무슨 상황인지 잘 몰랐다. 그런데 민정우는 그 키만 장대같이 큰 여자아이와 다정하게 몇 마디 주고받고는 그 꼴도 보기 싫은 여자애의 손을 덥석 잡는 게 아닌가! 나는 인사하기 위해 눈치 없이 올라온 오른손을 급히 내렸다.  눈물이 차오를 것 같은걸 억지로 참아냈다. 그리고 그들의 키득거리는 웃음소리와 꽁냥꽁냥하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어 다시 뒤를 돌았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이거 마실래?”

눈물로 가득 차 울렁거리는 시야 앞엔 파란색 캔이 어느 남자의 손에 들려 있었다. 포카리 스웨트. 장수혁?

나는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는데 의도치 않게 나의 눈은 매섭게 올려다보게 되었다. 

‘뭐야, 이 한결같은 마음은.’


나는 포카리스웨트를 들고 있는 그의 손을 매정하게 쳐냈고 포카리 스웨트는 땅에 떨어져 나무 밑으로 대굴대굴 굴러갔다. 장수혁은 그것을 주우려고 나무로 향했고 나는 마침 도착한 마을버스를 타기 위해 다시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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