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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남 Sep 30. 2024

캡틴큐

그 책상 위엔 이미 많은 음료수와 선물, 인형들이 놓여 있었다. 어떤 학생이 지나가다가 그 책상을 건드리더니 두어 개의 선물이 툭 하고 떨어졌지만 다시 주어 올려놓지 않았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굴러 떨어져 나뒹굴고 있는 저 선물이 나의 마음 같아 애처롭기가 그지없었다. 나는 손에 들고 있는 음료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걸 갖다 놓는다고 내 마음을 알아주기나 할까 싶어 조금 슬퍼졌다. 이 시점에선 생각 없이 헤벌죽 하는 아이들과 난 다를 게 없었다. 아니 선물을 보아하니 난 그보다 못했다. 나는 천천히 뒤돌아 섰다. 


“와. 무슨 선물이 저렇게 많아?”


수빈이가 신경질조로 말했다. 그래 화가 났다. 누군가의 조공으로 본인은 위대함을 느끼겠지만 그게 다일것 같았다. 선물 하나하나 뜯어보며 감사해하거나 선물 준 아이가 누군지 관심 있어하지도 않을 게 분명했다. 나의 존재가 작아지는 느낌이었다. 에잇. 관둬. 이게 뭐 하는 짓이야 하며 고개를 들었는데…. 

앞엔 민정우가 있었다. 헐. 예나와 수빈이는 서로를 바라보며 손으로 입을 막았고 나의 머릿속은 금세 하얘졌다. 


“어! 버스 정류장에서….”

그가 나를 알아봤다. 그는 해맑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너무 당황해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좀 세련되고 매력적인 말을 하고 싶은 욕심이 과했는지 머리에 과부하가 왔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난 말없이 그를 응시하며 음료수를 앞으로 내밀었다. 


“마… 마실래?”


방금까지 했던 나의 비판적 자의식은 돌연 사라지고 나는 갑자기 조공을 선택했다. 그건 절대 의도하지 않은 것이었다. 절대. 게다가 나의 목소리는 약간의 떨림이 있어 매우 촌스러웠고  대사는 생각 없는 여자아이 같아 보였다.  내가 선을 그으며 경멸했던, 그 실실 대며 따라다니는 헤벌쭉녀들이랑 나는 이제 진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자존심이 구겨지는지도 모르고 난 아주 초라하고 떨리는 손으로 음료수를 내밀었다. 


“오! 고마워. 이거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료수야!”


그는 덥석 음료수를 받아 들고 바로 따서 벌컥 들이마셨다. 나는 그제야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날카로운 콧날과 단정된 눈썹. 작지도 크지도 않은 눈의 짙은 우주를 머금은 눈동자. 서구적인 눈코입을 가졌지만 전체적인 느낌은 매우 동양적이었다. 그는 다 비어진 음료수 캔을 보며 캬. 소리를 내더니 나에게 상큼하고도 담백한 윙크를 날렸다. 그리고 슝. 그는 자기 반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렇게 들어가 버리는 동안 나의 손은 아직도 허공에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그의 모든 제스처들은 하나도 느끼하지 않았고 오히려 세련되었다. 청량한 포카리스웨트 광고를 보는 것처럼. 

나는 그렇게 그에게 단 몇 초만에 다시 사로잡혔다. 나의 온몸은 주책없이 찌릿했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난 로봇 걸음처럼 아니면 마취 주사를 맞은 것처럼 뻣뻣해져서 우리 반으로 걸어왔다. 이 부자연스러운 동작 때문에 수빈이와 예나는 나의 양팔을 잡고 부추겼다. 그들은 나에게 연신 말을 쏟아부으며 난리법석을 떨었는데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의 섹시한 눈빛만 생각할 뿐이었다.  맞았다. 나는 더 큰 사랑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며칠 후, 학교 내 행사로 1학년 전교 농구 리그전이 열렸다. 반 별로 팀을 묶어놔서 에이스가 있는 반이 유리했다. 민정우도 농구를 축구보다 잘한다고 소문이 나있었다. 민정우 덕분에 그의 반이 계속 승리를 거두었다. 민정우 반이 경기가 있을 때마다 우리는 구경했다. 민정우 플래카드를 정성스럽게 만들어와 흔드는 친구들이 많았다. 민정우가 한 골 한 골 넣을 때마다 환희의 비명이 쏟아졌다. 플래카드를 들고 있는 아이들이 저마다 민정우 이야기에 심취되어 있었다. 그들은 누가 더 많은 정보를 아느냐 경쟁하는 것 같았다. 그런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민정우는 나를 알아본 사람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리고 그가 잘할수록 마치 우리 내 가족이 성공한 것 마냥 신이 났다. 다른 여학생들과 달리 나는 목이 터져라 응원하지 않았다. 그의 여자친구라도 된 듯 최대한 예쁜 모습을 유지하며 흐뭇하게 지켜볼 뿐이었다. 난 헤벌쭉녀가 되긴 싫으니까. 

우리 반도 의외로 선전하는 바람에 준결승에 이어 결승까지 올라갔다. 다음 날 결승전이 열렸는데, 결승전은 그래서 우리 반과 민정우 반의 경기로 이루어졌다. 나는 민정우 경기를 다시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아침부터 신이 나있었다. 우리 반은 남학생들을 제외한 모든 학생들이 민정우반을 응원할 기세였다.


“야, 민정우 쪼다들. 너네가 1반 응원한다고 1반이 햄버거 사줄 것 같냐! 머리는 텅 비어가지고서는.”

남학생들 사이에서 원색적인 비난이 쏟아졌지만 우리 반 여자애들은 타격감이 전혀 없었다. 얼굴이 못났으면 실력으로 승부하라고 하면서 오히려 으름장을 놓았다. 

알고 봤더니 우리 반 에이스는 장수혁이였다. 수혁이는 내가 민정우에게 음료수를 주러 가던 날 이후 나에게 더 이상 음료수를 주지 않았다. 나는 마음의 부담을 내려놓았지만 약간 아쉬운 마음은 있었다.  나는 필요할 때 간간히 그의 숙제를 베끼고 장난으로 주먹질을 해가며 친밀감을 유지했다. 그날도 나는 두 손을 조그마한 조끼 주머니에 넣고 건들거리며 그에게 다가가 팔을 툭 쳤다. 


“야, 우리 반 1등 하면 상품으로 햄버거 준다며?”

“어. 우리 반 응원해 줄 거야?”

“어어어. 그럼 그럼.”

“고… 흐… 고고마워.”

 나는 아저씨처럼 능글맞게 대꾸했지만 그는 수줍게 삐져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으며 대답했다. 


드디어 결승전이다. 이번엔 전교생이 와서 구경을 했다. 시작 전부터 열띤 분위기였는데 이 모든 것이 다 민정우 때문인 것 같았다. 각 팀의 선수들이 소개되었다. 


“민정우!”

그의 이름이 울리자 비명 소리로 장내가 들썩였다. 그는 여전히 멋지게 그리고 익숙하게 관객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경기가 시작됐다. 전교생이 모두 1반을 응원하고 있었는데 마치 1반 홈경기 같았다. 민정우가 골을 넣을 때마다 환호소리는 더 커져만 갔다. 하지만 우리 반 실력이 만만치 않았다. 사실 2 쿼터에 와서는 이기고 있었다. 하지만 장내 분위기는 1반이 이겨야 할 것 같았다. 우리 반이 이기기라도 하면 날계란이라도 던질 기세였다. 


“야, 야.”

예나가 팔꿈치로 나의 팔을 툭툭 쳤다. 예나의 시선을 따라가서 본 인물은 다름 아닌 장수혁이었다. 그가 날 보고 있었다! 그는 이 수많은 관객 가운데서 굳이 아주 쬐끄만한 나를 찾아낸 것이다. 내가 그를 보자 그는 나에게 수줍은 미소로 화답했다. 


“으으아악!! 쟤 왜 저래! 왜 수줍고 저래!”


나는 경기를 일으키듯 외쳤고 예나와 수빈이는 나를 한껏 비웃었다. 예쁜척하고 앉아 있으려고 했는데 저 노무시키 때문에 채신머리없이 굴어버렸다. 젠장. 

다시 경기가 이어졌다. 난 민정우의 날씬한 다리를 보며 여자보다 매끈한 다리에 한 없는 질투를 느꼈다. 하지만 그런 민정우가 나를 좋아할걸 생각하면 그 매끈한 다리도 내 것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에 모든 것이 용서가 되었다. 점수는 60:60으로 동점이다. 민정우반의 공격 차례였다. 그는 호기롭게 드리블을 해가며 자신의 진영에 들어간 다음 앞에 두 선수를 장난치듯 놀려가며 아주 멋있게 뚫고 링 아래까지 들어가 레이업 슛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 중요한 시점에서 골이 들어가지 않고 말았다. 그걸 리바운드한 장수혁이 속공으로 가져가 여유롭게 우리 팀에 점수를 내었다. 그리고 또다시 점수 차를 벌려 놓았다. 수혁이가 골을 잡는 순간부터 골을 넣을 때까지 전교생의 야유가 있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수혁이는 나를 보았고 그는 두 손가락으로 자기 눈썹에 대었다가 살짝 튕겨내는 행위를 했다. 캡틴큐를 한다고? 그건 본인이 잘생겼음을 알았을 때 하는 행동 아닌가! 나는 충격에 휩싸여 그를 외면하고 말았다. 


“야, 방금 너한테 그런 거야?”

수빈이가 또 신경질조로 물었다. 

“아니!!”

나는 더 큰 신경질조로 대답했다. 


사람들의 야유를 받을 때는 눈치 있게 가만히나 있지 나에게 저런 인사를 한다고? 나는 너무 창피한 나머지 몸을 최대한 움츠리고 고개를 숙였다. 경기 전 괜히 말 걸었나 싶었다. 내가 그에게 큰 의미라도 주었나 싶어 몸이 오글거렸다.


삐. 삐. 삐.


경기가 끝났다. 승리는 우리 반. 우리 반 남학생들만 자리에 일어나 벌떡 벌떡 뛰어가며 승리를 만끽했다. 민정우는 진 것이 실감이 나질 않는지 허리에 두 손을 올려놓고 고개를 계속 흔들었다. 그가 수건으로 어깨에 두르자 또 한 번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가 지건 말건 그가 하는 모든 행동에 팬들은 비명을 질러댔다. 반에 돌아오니 맛있는 햄버거가 있었다. 담임 선생님과 남자아이들은 상품으로 나온 햄버거를 먹으며 승리에 만취되어 있었고 여자 아이들은 민정우 이야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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