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남 Oct 01. 2024

새겨진 죄

    민정우를 향한 혼자만의 이별을 극복할 땐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민정우와 이준희라는 여자아이가 사귄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는데 그 때문에 이준희에 대한 평판은 끝없이 추락했다. 

    민정우는 세상 착하고 순진한데 불여시 같은 그녀가 꼬셔서 그 순둥이 같은 남자아이가 홀라당 넘어갔다는 등, 그녀의 외모는 (우리 중 누구보다 나았지만) 턱이 좀 기다느니, 목소리가 이상하다느니 하는 내가 생각해도 쪼잔한 것들로 트집을 잡고 욕을 했다. 게다가 모든 남자에게 쓸데없이 추파를 던지고 다니고 남자를 사귀기 위해서라면 거짓말을 밥먹듯이 한다고 했다. 그녀의 동생은 늘 폭력만 일삼는 일진인데 엄마가 극성이라 피해자에게 사과는커녕 자기 아들 감싸기만 한다고, 가족까지 들먹이며 그녀를 잘근잘근 씹었다. 

    난 그런 이야기들을 즐겼다. 선택받지 못한 기분, 혹은 버림받은 기분을 그것으로 치환시켰다. 나는 비겁해졌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속상함을 달랠 길이 없어 보였다. 나는 최대한 적극적으로 앞장서서 그녀를 욕했고 그러고 나면 나는 그녀보다 좀 더 나은 사람이라는 착각으로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언젠간 민정우가 그녀와 얼마못가 헤어지고 다시 나와 사귈 것 같은 생각에 휩싸이기도 했지만 이내 그러지 못하는 현실에 더 깊은 나락으로 슬퍼졌다.


    그러는 와중에 나는 장수혁에 대한 미안함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에게 한 모진 행동은 시간이 지날수록 선명해져서 나를 밤마다 괴롭혔다. 그때 내가 왜 그랬을까.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정말 성질 하나 더럽다! 나는 수혁이의 얼굴을 차마 보지 못했다. 내가 수혁이라면 나란 인물에 질렸을 것이다. X 년이라고 욕하고 다녀도 난 할 말이 없겠다 싶었다. 나는 수혁이를 피했다. 그도 나에게 말을 거는 것 같지 않았다. 기회가 되면, 언젠간 기회가 되면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추악한 나의 행동은 그래도 용서받지 못할 것 같았다. 민정우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 사실 보다 내가 장수혁에게 모진 행동을 했다는 사실이 더 괴로웠다. 


    어느덧 우리는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 입시 전선으로 뛰어들었다. 해야 될 것은 많고 시험이 줄줄이 있어 모두 정신없이 스케줄에 따라가기 바빴다.  민정우도 장수혁도 차츰 나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공부만 해야 되는 시기였지만 그 와중에도 난 교실 창밖을 바라보며 딴생각하기 바빴다. 공부가 너무 하기 싫어서 괜히 계절을 탔다. 봄이면 봄이라서, 여름이라서, 가을이라서, 때때마다 신이 났고 계절마다 바뀌는 하늘 색깔, 나무 색깔, 꽃, 풀 색깔, 공기냄새를 즐겼다. 나는 고3이라는 이유로 나를 극진해 대접해 주는 엄마가 조금 부담스럽기도 하면서 어느새 그것에 길들여졌다. 나는 반찬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밥을 깨작깨작 먹다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러면 엄마는 안절부절못하면서 조금이라도 더 먹으라며 나를 채근하다가 더 이상 잔소리를 하지 않으셨다. 집에선 내가 왕이었다. 엄마는 내가 스트레스받을 까봐 나를 살폈지만 나의 마음은 세상 편안했다. 점수에 스트레스받는 대부분의 아이들과 달리 나의 고3은 그렇게 눈치 없이 행복하고 신이 나는 해였다. 

    그 사이 모범생 예나는 수시에 합격했다. 나는 그녀를 진심으로 축하해 줬지만 그녀가 목표한 대학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녀 스스로는 여전히 스트레스를 받는것 같았다.  

    수능이 기다리고 있는 겨울이 왔다. 나는 공부도 열심히 하지 않으면서 좋은 대학에 가길 바랐다. 나는 현실적이지 못한 편이라 입밖에 꺼내지 못할 꿈을 꾸기도 했다. 어쩌면 천의 운을 타서 원하는 대학에 합격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겁 없이 수능을 치렀다. 어쩌면 오늘부로 인생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도 막연히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인식하기엔 난 철이 없었고 진지하지 못했다. 나의 수능 점수는 나쁘진 않았지만 누구한테 자랑할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친구들의 점수가 궁금하지 않았다. 그들의 점수를 알고 나면 나의 것도 알려줘야 할 것 같아서였다. 

    예나와 수빈이는 결국 각자가 원하는 대학에 들어갔고 나는 내가 썼던 모든 대학에 떨어지며 어쩔 수 없이 재수를 선택했다. 재수를 하면서 점수는 많이 올랐지만 그제야 조금 공부에 감을 잡기 시작한 나는 다시 한번 수능에 도전했다. 그렇게 삼수 끝에 드디어 원하는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나는 수능을 준비하는 삼 년 동안 마음이 많이 늙었다고 느꼈다. 실패는 되바라진 나의 성격을 교정해 주는 것에 탁월했다. 그러고 돌아보니 고등학교 때의 모든 사건들이 모두 작아 보였다. 



    “유나야!”

    “꺅! 수빈아!”

    나는 너무 반가운 나머지 비명을 꽥 질렀다. 학교 앞에서 우연히 만난 수빈이는 화장도 하고 염색도 한 어엿한 여인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정말 예뻤다. 


    “잘 지냈어? 너 이 학교 다녀? 대박, 공부 열심히 했구나!”

    수빈이는 능글맞게 칭찬을 했다. 나는 멋쩍어서 고등학교 때처럼 크게 웃었다. 나는 수빈이의 손을 꼭 쥐었다. 


    “예나는? 예나랑 연락해? 잘 지내?”

    “응 그럼. 예나는 내년에 유학 간데.”

    “오오 올.”

    나는 괜히 유난을 떨면서 신명이 났다. 이야기마다 우리는 웃고 또 웃었다. 그러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수빈이는 장수혁이 이야기를 했다. 그는 서울대를 들어갔고 우리 동네에서 멀리 이사 갔다고 했다. 3년이 지나서야 깨달은 공부의 맛을 그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니 그가 갑자기 대단해 보였다. 생각해 보니 그는 늘 성실히 숙제를 했고 3년 내내 전교 1등도 했었다. 

    “수혁이 덕분에 1년 동안 아침마다 음료수는 자알 마셨다!”

    “너한테도 음료수를 줬어?”

    “아니! 하하 그럴 리가. 너한테 준거 내가 너 오기 전에 먹었지. 네가 그랬잖아 우리 보고 돌아가면서 마시라고.”

    “계속 주고 있었다고?”

    그 이후로 주지 않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이 한결같음은 뭐지? 나는 순수하기 그지없어서 바보같아 보이는 그가 목이 매이도록 불쌍해졌다. 그러다 갑자기 음료수를 내리친 사건이 기억이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왜 그래?”


    수빈이가 얼음같이 굳어진 내 표정을 보고 걱정했다. 나는 화장실을 가야 된다며 적당히 둘러대고는 잠시 자리를 피했다. 나는 화장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보고 놀랐다. 경직되어 웃음기가 없는 저 얼굴은 내가 아닌 것 같았다. 창피함이 가득 찬 그 얼굴. 저 얼굴은 정말 다른 사람 같았다. 그 수치심은 아직 마음 깊은 곳에 있었다. 평상시 착한 이미지를 달고 사는 나에겐 정말 치명적인 사건이었다. 아마도 그를 다시 만나서 머리를 조아리지 않는 이상 극복하지 못할 것이다. 지워내려고 한들 뭘 하나. 이미 그 기억은 문신처럼 새겨져 있는 것을. 나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나의 대학 생활은 성실했다. 민정우 보다는 아니지만 그래도 괜찮은 외모의 남자와 사귀기도 했고 어학연수도 다녀왔다. 무난히 졸업을 하고 모두가 부러워하는 직장에 취업도 했다.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어려웠지 나머지는 주도 면밀하게 준비해서 인지 나쁘지 않았다. 월급을 받으면 부모님께 용돈도 드리고 독립도 했다. 점점 사람 구실하며 살기 시작했다.

    출근하자마자 나는 먼저 와 계신 팀장님께 인사를 하고 내 자리에 가서 앉는다. 팀장님은 안경을 쓰신 곰돌이 같았다. 말이 많이 평상시에 없고 잔소리 하는 법도 없었고 일적인 면은 매우 꼼꼼했다. 배울 점이 매우 많았다. 

    입사 때부터 팀장님은 유난히 나를 예뻐하셨다. 그 때문에 옆에 앉은 수아 씨가 대놓고 질투를 했다. 팀장님이 나에게 무언가를 부탁하려고 서류철을 내밀면 수아 씨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그것을 내 앞에서 가로채고는 애교를 부리며 ‘제가 할게요.’라고 했다. 나는 그녀가 피곤했다. 허스키한 그녀의 목소리와 애교는 정말이지 어울리지 않았다. 

    내 뒤에 앉은 태민 씨의 주된 관심사는  주식이나 투자다. 그는 이런 주식은 사놓으면 몇 배를 갈 것인지 얘기를 하면서 우리에게 조언을 했지만 정작 자신이 모아둔 재산은 없는 것 같았다. 그는 돈에 대한 허세가 심했는데 마치 금방이라도 일확천금을 움켜쥘 것 마냥, 아니 정말 그런 큰돈을 가지고 있는 듯 자신감이 있었고 당당해 보였다. 나는 그가 그런 자신감 있는 표정을 지을 때마다 걱정이 되었다. 그의 그런 낙천적인 관망이 철없고 멍청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아 씨는 그런 태민 씨의 허영이 멋있어 보이나 보다. 그가 말할 때마다 “우와. 대단해요!”라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들의 그런 성품들은 견딜 수 있었다. 

    그들은 아주 자주 팀장님에 대한 험담을 하였다. 행동이 너무 굼뜬다느니, 시킨 일을 또 시킨다느니라는 시답지도 않은 것으로 팀장님을 비난했다. 그렇게 욕을 하지 않으면 그날의 대화는 끝나지 않았다. 그건 습관처럼 해야 되는 것이었다. 


사실 맨날 칭찬해 주는 팀장님을 제외하면 마음을 터 놓고 친해지고 싶은 사람은 없었다. 어디에서도 끼지 못하고 나는 열심히 일만 했다.  따분하고 지루한 날들이 계속되었다. 밥도 따로 먹고 같이 수다 떠는 시간도 없었다. 팀장님이 떠난다고 할 때까지는.

이전 05화 초록담벼락은 죄가 없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