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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남 Oct 02. 2024

간드러진 목소리

    팀장님이 인사이동으로 마케팅부에 가신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소문은 거의 확정적이어서 나는 오래간만에 긴장이 되었다. 직장에서 사람 같은 사람은 그분밖에 없었는데, 그분이 떠나신다고 하니 직장 생활이 조금 막막해졌다. 수아 씨와 태민 씨는 팀장님의 이동 소식을 은근히 환영하는 것 같았다. 이제 그들의 관심사는 ‘어떤 새로운 분이 올까'였다. 

    내가 평소 그들에게 먼저 질문을 하는 법은 없었다. 그들의 대화에 끼고 싶은 생각도 없고 그들에게 관심도 없어서였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정말 물어봐야 했다. 나는 그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그들의 대화를 끊어냈다. 


    “근데요…. 팀장님 말이에요. 왜 가세요? 어디로 가세요?”

    “평소 원하던 부서가 마케팅부 서였데요. 이제 옮기실 때도 됐죠. 영원히 기획팀에 있을 수는 없잖아요?”

    수아 씨가 신이 나서 말했다.

    “안 그래도 저한테 레퍼런스 전화가 왔었는데 팀장님 어떻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정말 좋으신 분이라고 말했죠. 그래야 팀장님 옮기실 수 있으니까요. 팀장님도 좋고 우리한테도 좋고. 하하하하.”

    태민 씨가 대단한 일이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그는 아무것도 아닌 일을 크게 부풀려 말하는 재주가 있다. 레퍼런스 콜은 왜 저 놈한테 간 거지? 나는 시무룩한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뭐야, 유나 씨? 아쉬워요? 표정이 왜 그래?”눈치 빠른 수아 씨가 팔짱을 낀 채로 말했다. 

    “그래도 좋으신 분이 다른 부서로 이동하시는데 아쉽죠. 그럼 이만.”


    나는 더 이상 말을 섞기 싫어 고개를 까닥하고 인사한 다음 자리를 떠났다. 내 등 뒤로 그들의 키득키득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나를 향한 비웃음이어도 상관없었다. 유치하기 그지없었다. 난 그들이 친밀해진 걸 속으로 반기고 있었다. 언제는 태민 씨가 나에게 추파를 던지듯 커피 한 잔 하자고 했는데 나는 단칼에 거절했다. 그의 목소리는 느끼했고 교만했다. 그 이후로 몇 번 더 저녁 약속이나 커피 한 잔을 물었지만 나는 철벽을 쳤다. 나는 그렇게 할 때마다 이상한 희열을 느꼈다. 그러자 그는 나를 대놓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유나 씨, 그렇게 꽉 막혔는지 몰랐네. 그래서 어떻게 여기서 살아 남기나 하겠어요?”

     내가 그를 거절하자 그는 헛소리로 나를 자극했다. 하지만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얼마 뒤  그는 마치 나에게 복수라도 하듯 수아 씨와 꽁냥꽁냥했다. 나이스! 나에게 집착이라도 할까 봐 내심 걱정했는데 잘됐다 싶었다. 그 둘은 정말 잘 어울렸다. 결혼이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팀장님이 그들이 한 일을 혼낼 때마다 난 쾌재를 불렀다. 나는 그들을 몰래 지켜보며 ‘더 혼나야 해, 곤란해져야 해, 망해야 해’를 외쳤다. 나는 그들의 몰락을 구경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의 상상처럼 그들은 몰락하지 않았다. 늘 자비로우신 팀장님의 격려로 사건은 무마됐다. 그게 늘 아쉬웠다.


    팀장님은 정말로 떠나셨다. 그가 있던 마지막 일주일 동안 그는 나에게 더 친절했고 더 상냥했다. 나는 떠나시게 되어서 아쉽다는 말을 매일매일 했다. 나의 아쉬운 소리는 내 의도보다 더 지나친 경향이 있었다. 생각해 보면  사실 난 그가 떠나셔도 크게 상관없었는데 말이다. 그런데 오늘 그의 빈자리를 멍하니 응시하고 있다가 ‘퇴사나 할까?’라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팀장님을 사랑한 것도 아닌데 그의 빈자리는 연인의 이별처럼 슬펐다. 그렇게 슬펐다가도 사람들과 대화할 땐 해맑게 웃고 일도 평소보다 탁월하게 해냈다. 맞다. 난 사실 슬프지 않았다. 그저 슬퍼질 구실을 찾고 있었다. 

    나의 삶이 너무나도 무미 건조해 업 앤 다운을 억지로라도 만들어 보고 싶었다. 슬퍼서 울고 그러다가 멈추면 속이 좀 시원해질 수 있는 그런 해소의 상태. 높낮이가 있는 삶을 원했다. 누군가는 분명 그런 소망을 ‘팔자 좋은 소리’라던가, ‘고생을 안 해봐서 그런다’로 폄하할 수 있겠지만 나는 당장 이 무료함을 견딜 수 없었다. 철없게도 난 슬프고 싶었다. 고뇌하고 싶었다. 



    “자 주목, 제작 3팀에서 기획 팀에 팀장님 자리 지원사격 나왔습니다.”다른 팀장님께서 큰 소리로 외쳤다. 


    “안녕하세요. 장수혁입니다.”

    “우리 회사에서 얼마 없는 인재입니다. 이 팀에 많은 도움이 되길 기대해 봅니다.”

    모두 그를 환영하는 의미로 손뼉 쳤다. 


    뭐? 설마 그 장수혁? 나는 저 멀리 서 있는 키 큰 남자를 모니터 뒤에서 힐끔 훔쳐봤다. 멀리서 봐도 내가 아는 그 장수혁은 아니었다. 나는 잠시 긴장했다가 몰래 한숨을 쉬었다. 세상이 아무리 좁다 한 들 갑자기 이런 곳에서 만나겠어? 그는 훤칠했다. 그의 외모를 보자 사무실 내 여자들은 서로서로 눈을 마주치며 조용한 비명을 질렀다. 그는 다른 팀장님의 소개를 받으며 모두 일어서 있는 우리들에게 한 명 한 명 악수를 했다. 악수를 하는 여자들은 하나같이 수줍어했고 특별히 수아 씨는 더욱 그랬다. 

    “안녕하세요. 새로운 팀장님. 이… 이번 프로젝트 기대 됩니다.”

    그가 수아 씨와 악수를 하자 수아 씨의 목소리는 한껏 간드러졌다. 역시 그녀답게 적극적이었다. 지금까지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네. 저도요.”

    그는 짧게 대답했다. 그가 대답하자 여기저기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목소리까지 프로페셔널하다. 그걸 본 태민 씨는 속이 타는지 머리를 자꾸 쓸어 넘겼다. 하하하. 꼴에 경쟁이라도 하나 보지. 

    그가 나에게로 가까이 오는 동안 내가 아는 장수혁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김유나. 진정해.’ 이름 가지고도 화들짝 놀랄 만큼 그가 중요했던 인물이 아니었잖아. 그리고 그리고 하기엔 이 장수혁 씨는 너무 말랐고 키도 크고 얼굴도 잘생겼….


    “김유나?”

    “네?”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인사를 하려다 말고 그를 다시 쳐다봤다.


    “나야. 나.”

    “누구…?”

     “수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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