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여전히 나의 손을 잡고 흔들며 살인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 어! 하하. 하하. 하하. 장.. 수혁.”
말도 안 돼. 장수혁은 덩치가 산만하고 여드름쟁이 었는데. 날렵한 턱선에 더 날렵한 코와 쌍꺼풀이 없는 눈은 반짝였고, 피부결은 지금 막 깐 달걀처럼 매끈했다. 매우 혼란스러웠다. 보통 여자 애들이라면 고등학교에서 성인이 될 때 다시 태어난다고 하는데 이 아이야 말로 다시 태어난 게 아닌가! 깔끔하게 차려입은 옷, 살이 빠져서 더 길어 보이는 다리. 그리고 눈썹 밑까지 적당히 길어서 살짝 왁스를 발라 큰 파도 같은 웨이브가 생긴 머릿결은 과하지 않고 세련되기까지 했다.
우린 아무렇지도 않게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내가 동경했던 팀장님의 빈자리에 그가 당당하게 앉았다.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나는 조용히 앉아서 상황을 파악했다. 심박수가 올라가고 있음을 느꼈다. 어쩌다 저 아이가 팀장이 되었지? 초고속 승진이라도 한 것일까. 조기 졸업에 뭐 그런 거 아니야? 그가 나에게 악수할 때 나를 아는 척했기 때문에 수아 씨는 나를 힐끗 바라보며 왠지 모르게 분주해졌다. 그녀는 화장실을 가는척하다가 나의 자리로 와서 무슨 사이냐고 물었고 나는 고개를 핸드폰 진동처럼 흔들며 그녀와의 대화를 잘라냈다. 그녀는 입을 삐죽 거리며 자리를 떠났다.
“유나 씨.”
장수혁이다. 나? 아이씨. 부르지 마.
“네.”
“이것 좀 체크해 줄래요?”
그때 수아 씨가 벌떡 일어나 말했다.
“제가 할게요. 팀장님. 그거 원래 제가 했던 일이거든요.”
그래 그래 나 대신해줘. 내 일을 뺏어 가는 게 이렇게 반가울 줄 몰랐다. 나는 일어나려다 말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아니요. 김유나 씨가 해줘야 되는 일이에요. 유나 씨 여기요.”
와. 저 유능해 보이는 말투. 쟤가 원래 저랬었나? 원래 말더듬이 아니었었냐고. 나한텐 늘 말을 더듬었었는데.
“네. 팀장님.”
난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난 그의 책상 앞에 서서 그가 주는 파일을 홱 낚아채고는 빠르게 자리로 돌아왔다. 그런 움직임이 너무 어색하고 창피했다.
점심시간에 무언가 냄새를 맡은 수아 씨는 내 앞에 앉았다.
“장수혁 팀장이 유나 씨 자꾸 쳐다보던데. 무슨 사이였어요? 둘이 어떻게 알아요? 전 남친?”
“아니요.”
“그럼 뭐예요? 어떻게 알아요? 그럼 여자친구는 있대요?”
수아 씨는 밥을 먹는 건지 마는 건지 말하기 바빴다.
“뭐 그렇게 남 일에 관심이 많아요. 장수혁 팀장이 유나 씨한테 관심 있나 보지 뭐. 수아 씨는 밥이나 먹어요. 얼른.”
수아 씨 바로 옆자리에 앉은 태민 씨가 심드렁하게 말하면서 그녀 자리에 물을 건네주었다.
“전 남친이에요? 둘이 어떻게 아세요?”수아는 개의치 않았다. 아마도 내가 입을 열 때까지 계속 말할 기세다. 근데 왜 남친도 아니고 전남친이지?
“전 남친 아니고요. 고딩 동창이에요.”
나는 이제 좀 지친다는 표정을 지으며 딱 잘라 말했다.
“어히구. 무서워라. 난 유나 씨 이럴 때 정말 무서워.”
태민 씨는 나를 놀리듯 고개를 흔들었다.
“친했어요? 같은 반? 팀장님 서울대 수석졸업에 조기졸업 했다는데 고등학교 때도 공부 잘했겠네요! 완전 인기쟁이?”나의 대답을 기다리지 못하고 수아 씨는 끝없이 질문했다. 수석졸업, 조기졸업은 나도 몰랐던 사실인데, 대단하군.
그때였다. 장수혁이 점심을 드시러 식당에 들어왔다. 그의 위풍 있는 걸음걸이는 모두의 눈을 사로잡았다. 그가 들어오자 여자 직원들은 수군댔다. 수아 씨의 질문도 드디어 멈췄다. 그가 설마 내 옆에라도 앉을까 봐 난 긴장이 되었다. 또 아는 척을 하면 어쩌지. 난 그와 대화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와의 마지막은 생각하기도 싫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그가 음식이 가득 담긴 식판을 들고 우리 쪽으로 오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젓가락으로 미끌미끌 굴러가는 콩자반을 집는 척을 했다.
“팀장님! 저희랑 같이 먹어요.”
두 명의 여자들이 장수혁의 양팔을 잡으며 애워쌓다. 그는 그녀들의 인도하에 우리와 두어 칸 떨어진 곳에 앉았다. 나는 그가 말이라도 걸까 봐 밥맛이 뚝 떨어졌다. 나는 젓가락 사이로 빠져나간 콩자반을 포기하고 바로 일어났다.
“유나 씨 벌써 다 먹었어요?”
“네.”
내가 그를 피하는 게 조금 티가 날 정도로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식당을 빠져나왔다. 그가 반갑지 않은 건 아니었다. 대학생이 돼서 오랜만에 수빈이를 만났을 때처럼 신날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마냥 반가워할 수가 없었다. 그에 대한 미안함도 컸고 게다가 지금 그가 너무 잘생기게 변해버려서 위화감마저 들었다. 나는 괜히 주눅이 들었다.
사무실 안의 공기는 새로워졌다. 무언가 신나는 일이 곧 터질 것처럼 상기되어 있었다. 이게 다 장수혁 때문일 것이다. 팀장님 자리에는 아니 장수혁 자리에는 커피 캔이 몇 개 올려져 있었다. 곰돌이 같았던 팀장님이 있었을 때와 딴 판이었다. 이것이 수아 씨가 바라던 그림이었을까.
그는 항상 누군가와 같이 있었다. 대부분 여자였다. 여자들은 노골적으로 자신을 어필했다. 그가 나와 안다는 사실만으로 나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이 생긴 반면 정말 전여친이라도 될까 봐 경계하는 사람도 많았다. 처음에 사람들이 그와의 관계를 물어볼 때마다 난감해했지만 얼마 지나자 나는 기계적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늘 싫어하던 지루함은 순식간에 없어졌다. 하지만 내가 바라던 건 이런 불안함이 아니었다. 난 불안했다. 그가 말을 걸 때마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러면 장수혁은 피식 웃었다. 이런 내가 웃기겠지 그렇겠지.
난 절대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 옛날 다짐했던 ‘언젠가 그를 만나면 미안하다고 말해야지’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나의 죄책감은 어느새 상쇄되고 있음을 느꼈다. 그는 이미 나에게 복수하고 있었다. 나의 당황함을 보고, 내가 어딘가 수줍어하는 것을 보고 그는 속으로 비웃었을 것이다. 어쩔 줄 몰라 일만 하는 나를 즐기고 있을 것이다! 그러다 우린 복도에서 마주쳤다. 이렇게 대면하게 될 날이,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운명처럼 둘 밖에 없을 때였다.
“유나야.”
“네?”
난 왜 존댓말을 하는 걸까. 그가 또 피식 웃었다. 그만 웃어 이 새끼야.
“넌 그대로네.”
“네?”
난 또 존댓말을 했다. ‘네?’ 밖에 할 줄 아는 말이 없는 것처럼.
“좋은 의미로.”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얼굴을 당당히 쳐다보지도 못하고 힐끔힐끔 거렸다. 이런 식의 직장 생활이면 조만간 때려치우고 말 것 같았다. 난 ‘그래서 뭐 어쩌라고’라는 미소를 지으며 내 자리로 돌진했다. 음 아니. 돌진하는 마음으로 아주 천천히 걸어갔다. 그는 내 뒤통수에 대고 또 잔잔한 웃음소리를 냈다. 뭐야. 왜 이렇게 멋있게 웃어?
저 여유 있는 웃음소리가 거슬렸다. 그의 멋짐은 나와 상관없었다. 숙제 보여달라고 당당했던 나는 어디로 가고 ‘네?’ 라니.
자존심이 상했다.
나는 전략을 바꾸기로 했다. 서류를 건네받을 때도 인사를 할 때도 최대한 자연스럽게 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저 능글맞아진 장수혁은 나를 농락이라도 하듯 유독 나에게만 일을 산더미처럼 주는 것 같았다. 난 열심히 일했다. 그를 없는 셈 쳤다. 그리고 속으로 되뇌었다.
‘장수혁 팀장님은 그냥 팀장님이다.’
띠링!
띠링!
나와 수혁이의 전화기에서 동시에 문자음이 울렸다.
[00 고등학교 동창회가 열립니다. …00월 00일 00시 00에서]
고등학교 동창회? 수빈이와 예나에게 연이어 문자가 왔다. 그들은 가고 싶으니 나도 가야 한다고 협박했다. 나는 얼른 그들에게 장수혁 소식을 전했다. 그들은 그가 팀장님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은 믿으면서도 그가 잘생겨졌다는 사실은 믿지 않았다. 그를 칭찬하고 있는 내가 적응이 되지 않았는지 수빈이와 예나는 나를 더 구박했다.
나는 슬그머니 그를 쳐다보았다. 마침 늦은 오후 햇살이 쳐들어와 마치 그가 주인공인 것처럼 스팟라이트를 만들어 주었다. 그는 너무 일에 열중하고 있어서 내가 훔쳐보고 있다는 사실도 모를 것 같았다. 살짝 걷어 올린 소매에 드러난 팔은 다부졌고 어깨는 적당히 벌어져 있었다. 어떻게 저렇게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집중할 수 있는지 신기했다. 나는 갑자기 그가 하고 있는 일이, 그가 보고 있는 모니터가 부러워졌다.
뭐야. 나 뭐 하는 거야? 나 지금 그를 응시하는 거야? 두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휘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