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벌써 28살이니까 8년 만에 만나는 친구들이다. 지난 8년간 수빈이와 예나를 만날 기회는 별로 없었다. 나는 그녀들이 너무 보고 싶었다. 동창회는 일정 금액만 내면 무한으로 고기가 나오는 곳에서 열렸다. 나는 제일 먼저 도착했고 뒤이어 예나와 수빈이도 왔다. 오랜만에 만나는 예나는 여전히 예뻤고 수빈이는 조금 못 알아볼 정도로 얼굴이 달라져 있었다. 그녀의 성형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의 외모에 칭찬을 마르고 닳도록 했다.
갑자기 수빈이가 주위를 살피더니 우리의 머리를 모아놓고 조용히 말했다.
“야 오늘 민정우 온데!”
“헐.”
난 갑자기 화색이 돌았다. 민정우? 이준희랑 헤어지고 결국 나랑 사귈 것 같았던 그 아이. 나의 버스남. 나는 갑자기 가방 속에 있는 파우더 팩트를 꺼내 조심스럽게 열어 거울을 보면서 머리스타일을 정돈하고 피부 상태를 확인했다. 나는 립스틱도 꺼내려다가 수빈이 얼굴 뒤로 키가 큰 누군가가 들어오는 것이 보여 도로 집어넣었다.
그는 민정우였다. 나는 ‘안녕’ 이란 말대신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인사를 했다. 그는 왠지 어른이 되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고등학생 그대로 인 것 같은데 민정우만 나이를 먹은 것 같은 이상한 괴리감이 들었다. 그의 얼굴엔 고등학교 때의 상큼함은 없어지고 느끼한 세월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의 머리카락은 반질반질하게 빛이 났다. 한 가닥도 바람에 흔들리지 않으리라 결심한 듯 포마드 같은 것으로 덕지덕지 발라져 있었다. 모두 넘긴 머리카락 때문에 넓은 이마가 훤칠하게 드러났고 짙은 눈썹은 더 도드라져 보였다. 그가 생글생글 웃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좀 능글맞았다.
그의 상태를 스캔한 다음에서야 나는 그에게 쉽게 말을 걸 수 있을 것 같았다.
“나 기억나?”
“어 김유나. 기억나지. 우리 버스 같이 타고 다녔잖아.”
그가 과거의 사건을 왜곡하며 마치 우리가 정말 손잡고 버스를 타고 다니기라도 한 것처럼 친한 척을 했다. 난 그저 웃었다. 8년 전에는 이 모든 대화가 왜 이렇게 어려웠을까 싶었다. 나는 그를 우상시했고 눈도 쳐다보지 못했는데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의 눈은 더 이상 빛나지 않았고 얼굴 선은 더 굵어졌으며 목소리도 사회성 있게 변해 있었다. 그와의 대화는 깃털처럼 가볍다 못해 유치했다.
그런데 나는 이제 그가 재밌어졌다. 그렇게 동경하던 그를 아무렇지도 않게 대할 수 있게 되자 희열을 느꼈다. 나는 그의 말을 귓등으로 들으면서도 맞장구를 쳐주었고 미소를 지어주었다. 내가 그와의 대화를 흥미로워한다고 착각이라도 했는지 그는 나에게 아주 잘해주었다. 고기가 다 익으면 내 앞접시에 한 점 놓아주기도 하고 물을 따라 주기도 하며 휴지도 건네주었다.
“그래서 그 애랑 아직도 사귀어?”
“누구?”
“왜 그 여자. 있잖아 이준희?”
“아아아. 걔애?”
그는 간신히 그녀가 기억이 났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더니 2주 만에 헤어졌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랬었나? 그런데 왜 너희 둘이 깨진 소문은 안 돌았지?”
수빈이가 물었다.
“아. 걔가 거짓말하고 다녔더라고. 우리 계속 사귀고 있다고. 난 귀찮아서 해명하지 않았고. 하하. 언제 적 일이냐!”
그는 괜히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 대화를 하고 있을 때에도 그는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나는 그런 그의 관심에 신이 났다. 고기는 맛있었고 달콤한 사이다는 시원했다. 예나가 팔꿈치로 나를 슬쩍 건드리며 속삭이기 전까지.
“야야. 장수혁도 온데.”
나는 마시고 있던 사이다를 뿜었다. 그리고 얼굴이 붉어지도록 기침을 해댔다. 민정우는 내 옆으로 오더니 휴지를 주면서 등을 두드려 주었다.
맞다 장수혁도 있었지. 이쯤 되니 민정우의 관심이 부담스러워졌다.
“야 왜 그래. 장수혁이 아직도 그렇게 싫어? 정말 잘생겨졌다며.”
예나가 웃음을 참아가면 말했다. 그렇지. 잘생겨졌지. 너무 잘생겨져서 내가 곤란하단 말이다. 생각해 보니까 나는 아까까지만 해도 그를 동경했었다. 회사에서 그를 구경하는 건 나의 또 다른 낙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그의 변한 모습은 나만 간직하고 싶었다. 그냥 그가 오지 않길 바랐다.
“지지… 지금 우리 모임 거의 다 끝나가는데?”
난 이제 집에 가고 싶었다. 그가 오기 전에.
“수혁아!”
누군가 자명종이 울리듯 큰 소리로 그를 반겼다. 훤칠한 그가 걸어 들어왔다. 그는 모델 같이 걸어왔는데, 천천히 아주 멋있게 부드러운 표정을 하고는 내 앞으로 와서 앉았다. 거긴 원래 민정우 자리였다. 나는 민정우와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음에도, 그가 내 옆에 앉아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불륜이라도 저지르다가 걸린 것처럼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안녕.”
“오오오오오. 장수혁! 소문은 익히 들었다. 너 잘생겨졌다는 소문.”
수빈이가 흥분하며 큰 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마치 나의 진심을 전해주는 것 같아 창피해졌다.
“누가 그런 소문을…. 하하.”
나는 수빈이에게 고기 한 점을 입에 물려주고 나도 한 입 물었다. 민정우는 장수혁이 누군지 몰랐나 보다. 그가 오자 민정우는 말을 조금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둘을 가까이에 두고 보니 민정우는 장수혁에 비하면 동생 같이 어딘가 빈약해 보였다. 예나는 나에게 ‘대박’이라는 무언의 표정을 지어 보였고 그건 장수혁에 대한 칭찬이었다.
사실, 그를 이 밤에 다시 보게 되어서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민정우가 걸렸다. 그는 나에게 때마다 술을 따라 주고 고기도 주었다. 게다가 나를 끊임없이 바라보았다. 그는 나에게만 말을 걸었고 내 질문에만 답했다. 뭐 이런 돌직구 같은 성격이 다 있나. 그의 반질반질한 머리가 움직일 때마다 거슬렸다.
“민정우랑 친해졌네?” 장수혁이 섹시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 말조차 너무 똑똑하고 의지하고 싶을 만큼 안정되어 있었다.
“네?”
하…. 난 또 존댓말을 했다. 분명 그의 아는 척을 기다렸을 텐데 준비해 놓은 말이라곤 ‘네?’ 밖에 없었을까. 수빈이와 예나는 말없이 서로의 시선을 주고받았고 나는 그들에게 마음을 들킨 것 같아 신경질이 났다.
“어, 어. 오랜만에 만났는데….”나의 머릿속은 돌연 하얘졌다.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오랜만에 예쁜 유나 만났는데 너무 기분이 좋네. 유나가 그때도 예뻤는데 오늘 보니 더 예쁘다.”
민정우가 끼어들었다. 살짝 취기가 있어서 그런지 예쁘다 예쁘다만 남발했다. 난 자꾸만 내쪽으로 몸을 기우는 민정우에게서 떨어지려고 몸을 뒤로 뉘었다. 그러다 의자를 서서히 밀고 그냥 일어나 버렸다. 그리고 그냥 밖으로 나가버렸다. 차가운 바람을 쐐면서 마음을 진정시키는 것이 나았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어서 우산이 없던 나는 벽에 꼭 붙어 섰다.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들, 빗방울을 한 없이 쳐다보았는데 마음이 진정되기는커녕 나의 심장 박동수는 의지와 상관없이 빨라지고 있었다.
“유나야.”
장수혁이었다. 그가 나를 따라 나왔다. 그는 내 옆에 나란히 섰다. 그의 키가 새삼 크다고 느꼈다.
“어……. 수혁아.”
드디어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우리는 나란히 서서 빗소리를 듣고 있었다. 난 갑자기 이 모든 것이 만족스러워 웃음이 났다. 그리고 다시 고깃집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그가 나의 팔을 잡았다. 내가 그를 바라보자 그는 조각 같은 얼굴을 하고는 갑자기 수줍어졌다.
“유나야. 회사에서….”
“어.”
흥미롭고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난 그와 둘만 남겨진 상황도 짜릿했는데 그가 진지한 얘기를 하려 드니 손끝이 간질간질해질 만큼 신이 났다.
“내가 불편해?”
“아. 아니?”
나는 그게 무슨 말이냐, 쓸데없는 걱정일랑 집워 치우라는 말투로 정색하며 손사래를 쳤다. 매우 불편한 건 사실이었으나 나는 지금 당장 그의 마음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언젠간 꼭 그에게 음료수를 집어던진 것에 대해 사과를 해야 한다.
“근데 왜 날 피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