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남 Oct 04. 2024

오늘 고백할 거예요

피한다고? 내가 피했나? 난 항상 너를 바라보았는데? 나는 충격을 받았다. 


“안 피하는데?”

그리고 도리어 정색했다. 화낼 것까지는 없었는데 괜히 언성을 높이고는 바로 고깃집 안으로 들어갔다. 난 또 그를 피한 것이다. 그도 얼마 안 있다 따라 들어왔다. 그런 대화 이후 의지적으로 그에게 말을 걸었는데 그때마다 스스로 너무 어색해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 와중에 민정우는 자꾸만 나의 전화번호를 물어봤다. 내가 듣는 척도 하지 않으니까 민정우는 모두에게 전화번호를 물어보기 시작했다.  


다음날 회사에서 난 그를 더욱 쳐다볼 수 없었다.  난 그에게 더 공손하게 대했다.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했으며 보는 사람들이 없어도 연신 존댓말을 했다. 그게 더 편했다. 아니 편치 않았다. 나는 좀 더 친밀해지고 싶었다. 적극적으로 수혁이를 꼬실 수 있는 수아 씨가 질투가 날 지경이었다. 어쩌면 나는 그녀보다 수혁이와 친하지 않았다. 나는 외로워졌다. 

수아 씨는 틈만 나면 나에게 와서 수혁이에 대한 질문을 했다. 나는 그를 잘 알지 못했지만 그에 대해 아는 지식을 총 동원해서, 고등학교 때는 뚱뚱했다느니 여드름 쟁이였다느니라고 했다. 그러면 그녀는 기겁을 하고 놀라면서도 좋아 죽는 눈치였다. 


“수혁팀장님이 고등학교 때 사귀던 여자친구 있었어요?”

“없었을 걸요? 그 당시 외모로는 힘들죠. 지금이야 용 됐지.”


나는 살짝 비아냥 거렸다. 그런 식으로 나의 마음을 다스리기로 했다.  하지만 말투와 달리 나는 어느새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난 수아 씨가 그 이후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들을 수 없었다. 그가 너무 잘생겼다는 생각밖에는. 나는 기계적으로 커피 내리는 버튼을 누르고 컵에 다 차오르는 소리가 띵 하고 날 때까지 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수아 씨는 여전히 묻고 있었다. 그녀는 수혁이와 내가 진지한 관계이기라도 했을까 봐 검사하는 것 같았다. 


“지금은 여자친구 있을까요?”

“글쎄요.”


나는 들고 있던 커피를 마저 마시며 꼴깍 삼켰다. 우리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수혁이는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는데, 나는 정말 자연스럽게 고개 스트레칭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나는 정말 그를 피하고 있었다. 그가 내 손을 잡고 물었을 때 나는 몇 마디라도 더 했어야 했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그의 표정은 너무 진지했고 나는 그게 너무 좋았다. 세월의 때가 묻어 느끼해진 민정우와 달리 그의 눈은 여전히 순수하고 진지했다. 그에게 정색하고 들어오는 와중에도 난 그가 또다시 나를 잡아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말도 안 되는 전개였다. 

나는 왜 그를 피하는 것일까. 그에게 못되게 군 지난날의 죄책감, 미안함, 나의 행실에 대한 창피함, 그리고 그가 지금은 너무 잘나고 멋쟁이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오는 위화감. 게다가 어느새 흠모하고 있는 나의 설레는 마음. 그 모든 것이 합쳐지면 난 그에게 숙제를 보여달라고 떳떳이 말했을 때처럼 자연스러워질 수 없었다. 

나는 심란해진 마음에 작게 한숨을 뱉어냈다. 그리고 옆을 보니 수혁 씨를 넋 놓고 보고 있는 수아 씨가 있었다. 그녀는 조만간 장수혁이랑 정말 사귀기라도 할 것처럼 매일이 초흥분 상태였다.


“유나 씨, 어제 수혁팀장님이 저한테 뭐라고 그랬는 줄 아세요?”

“뭐라고…”

“엘리베이터 먼저 타시라고요!”

“아…. 하하하.”


그녀의 목소리는 신이 나 있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그녀의 그런 흥분에 같이 호응해 줄 수 없었다. 그런 착각은 고등학교때 끝냈어야 하는것 아닌가! 내가 고등학교 때 민정우랑 곧 사귈 것 같아서 매일 밤을 설레어했던 그런 것 아닌가! 


“그런데 수아 씨, 태민 씨랑 사귀는 거 아니었어요?”

“어머!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을!! 왜요?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녀는 펄쩍 뛰었다. 나는 큰 소리로 말하지도 않았는데, 그녀는 이런 말이 밖에 새 나가기라도 할까 봐 속삭였다. 

“그야 수아 씨가 맨날 태민 씨랑 붙어 다니고 태민 씨도 수아 씨를 잘 챙겨주는 것 같고….”

“태민 씨가 눈치 없이 절 쫓아다니는 거예요!”


그녀는 굉장히 불쾌한 표정으로 여전히 속삭인 상태에서 화를 냈다. 그가 너를 쫓아다니다니. 둘이 꽁냥꽁냥 할 땐 언제고. 나는 참으로 기가 찼다. 그녀의 줏대 없는 마음이 얄미웠다. 물론 수혁이는 누구라도 좋아할 만한 성품과 외모와 능력을 갖췄다. 수아 씨라고 안 좋아할 이유는 없었겠지. 


“내일 저 고백하려고요.”


그녀는 나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그녀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녀의 뒷모습은 경쾌했다. 나는 그녀의 씰룩씰룩한 엉덩이를 보며 헛웃음이 나왔다. 그녀가 귀엽기도 하고 안되기도 했다. 그녀는 차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때부터 나는 은근히 수아 씨를 관찰하고 있었는데 그녀의 욕심 많은 두 볼이 귀여워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치자 갑자기 초조해졌다. 나는 처음에 당연히 그녀와 장수혁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얄팍한 여자를 장수혁이 좋아할 리 없었다. 하지만 그건 언제까지나 나의 생각이었다. 얄팍하건 깊은 마음이건 남자들은 여자의 내숭을 대부분 눈치채지 못한다. 게다가 그도 남자이기 때문에 들이대는 여자를 마다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나에게 수아 씨는 얄밉지만 남성의 입장에서 보면 꽤나 귀엽다. 흠. 

나는 갑자기 일어나서 수혁이에게 갔다.


“더 시키실 일 없나요 팀장님?”

“지금은 괜찮아요.”

그리고 나는 내 자리로 돌아왔다. 꽤 만족스러웠다. 그가 나에게 미소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는 나와 대화할 때 실실 웃는다. 하긴 그가 실실 대는 건 고등학교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만의 밀당을 몇 번 하고 나니 벌써 퇴근 시간이다. 수아 씨는 태민 씨와 나에게 짧게 인사를 하고는 사무실을 탈출하듯 빠져나갔다. 이것 저거 신경 쓰느라 피곤한 나도 바로 집으로 향했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차가운 공기가 엄습했다. 나는 추위를 이겨내려 팔짱을 끼고는 시멘트 바닥을 쳐다보았다. 

“유나야.”

장수혁 목소리.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어. 퇴근하는 거야?”

“응. 집에 가?”

“어.”

나는 피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잘생긴 얼굴을 오랫동안 맞서기로 했다. 그건 엄청난 용기였다. 하지만 어색한 미소만 지어낼 뿐 더 할 말이 없었다. 우리는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어떻게 지냈어? 여전히 포카리스웨트 좋아해?”

“하하하하. 그때…. 조… 좋아하지.”

나는 얼굴이 붉어져서는 터질 것만 같았다. 그의 손을 내치는 장면이 스쳐 지나가자 더 이상 함께 걸을 수가 없었다. 내가 갑자기 멈춰 서자 그도 같이 멈춰 섰다.

“수혁아…. 그날 정말 미안했어. 그날 말이야. 버스 정류장 앞에서. 내가 그 음료수가 싫어서 친 게 아니라. 마침 정말 안 좋은 일이 있었거든.”

나의 목소리는 개미처럼 작아지고 오돌오돌 떨렸다. 나는 거의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의 모든 이야기를 신중히 듣더니, 

“하하하하하. 아 난. 또 뭐라고.”

그가 호탕하게 웃었다. 그리고 더는 말이 없었다. 우리는 한참을 더 나란히 걸었다. 나는 그의 웃음소리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정말 이제는 용서받은 자의 마음처럼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내일부터는 먼저 말도 걸 수 있을 것 같았다! 


“남자 친구 있어?”

“나, 나? 아니? 넌?”

“나? 많지.”

“어?”

“남자 친구 많지. 하하.”


장난꾸러기. 옛날에 너였으면 얄짤 없었을 농담이지만 지금은 그렇게 재미있다. 


“하하…. 아니…. 여자 친구.”

“없어.”


그는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나는 마음 한가득 행복이 차올랐다. 


다음날 출근하는 길에 수아 씨를 만났다. 수아 씨는 왠지 기분이 더 좋아 보였다. 

“저 오늘 고백할 거예요.”

그녀가 신나게 말했다. 그 사이에 내가 고백하기라도 하면 반칙하는 것이라도 되는것 처럼 그녀는 먼저 선포했다. 그녀가 그런 상황을 이끌어 나가는 기술은 교묘했다. 적극적일 생각이 전혀 없는 나는 그녀의 당당함에 다시 한번 사로잡혔다. 

그녀가 고백하면 수혁이는 나를 간만 보다가 차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와 경쟁하고자 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오늘 아침은 꽤나 위협적이었다. 그러다가 내가 뭐라고 그를 사수해야 하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내가 수혁이에게 괜찮은 존재이기나 할까? 어제 퇴근길에 확신했던 마음은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되어버렸다. 

“어… 어떻게 언제 하시려고요?”

“이따가 점심 먹고 한 번 힌트를 주고요. 그리고 저녁에 짜잔! 술 한 잔 하자고 해야죠.”

그녀의 계획이 이해가 잘 되지 않았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베이터가 우리 층에서 띠링하고 열리자 나와 수아 씨는 아침 인사를 하며 들어갔다. 수혁이는 먼저 와있었다. 나는 수혁이의 빛나는 미소를 보고 웃으며 인사했다.

그리고 자리에 앉았는데 책상 위에는 여전히 차가운 포카리 스웨트와 쪽지가 올려져 있었다.



이전 09화 마음 좀 들키면 어때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