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돌아와서까지 난 화가 사그라들지 않았다. 아니 더 불꽃같이 치솟아 올랐다. 지금까지 수아 씨랑 같이 있는 걸까? 생각만으로 너무 화가 났다. 이 녀석 수아 씨가 고백이라도 해서 마음이라도 흔들린 걸까. 그래서 문자 한 통 없었던 것일까!
가슴이 아렸다. 그가 날 죽도록 좋아해 주길 바랐다. 그의 마음이 고등학교 때처럼 성실하게 나에게 향했으면 좋겠다. 수혁이가 갑자기 너무 보고 싶어 가슴이 사무쳤다. 어쩌면 나에게 고등학교 일로 복수하는 건 아닌가 싶어 더 심란해졌다. 침대에 털썩 누워서 하얀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제 그는 너무 비싸서 사지 못하는 명품 주얼리 같았다. 유리관 안에 고이 모셔둔 반짝이는 반지 같은.
다음 날 아침, 수혁이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을까 싶었다. 아침까지도 그에게 문자 한 통 없었기 때문에 기분은 결코 나아지지 않았다. 나는 앞에 앉아 있는 수아 씨를 괜히 째려보았다. 이온 음료도 놓여 있지 않았다. 나는 모든 것이 신경질이 났다. 나를 더 힘들게 하는 건 수아 씨의 표정이었다. 그녀의 표정을 알 수 없었다. 어제 고백을 했다면 그녀의 감정이 결판이 나고도 남았을텐데 그녀의 기분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차분했다.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사람의 얼굴도 누군가에게 거절당한 사람의 얼굴도 아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어느새 수아 씨를 이제 나의 적으로 삼고 있었다.
그런데 9시를 훌쩍 넘기고도 팀장 자리는 비어있었다. 수혁이가 아직 출근을 안 한 것이다.
“유나 씨 커피 한 잔 할까요?”
수아 씨가 드디어 나에게 말을 걸었다. 왜? 어제 고백한 거 결과라도 보고할 참인가? 난 그녀랑 대화하기 싫었다. 행여라도 그녀가 수혁이랑 사귄다는 청천벽력 같은 말이라도 들을까 겁이 났다.
“지금은 제가 할 일이 많아서요.”
생각했던 것보다 더 딱딱한 말투로 나는 대답했다. 그러자 역시 눈치 빠른 태민 씨가 또 말을 걸었다.
“유나 씨, 오늘은 얼굴이 별로네? 뭐 안 좋은 일 있어요?”
“저요? 그래요? 난 똑같은데?”
또 거짓말을 했다. 태민 씨는 고개를 갸웃뚱거렸고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았다. 수아 씨는 나에게 말을 하고 싶어서 안달이었다. 수아 씨는 점심시간에 내 옆에 앉았다. 그리고 내가 어제의 일을 물어봐주길 기다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 사실을 잊은 것 마냥 굴었다.
“유나 씨, 저 어제 수혁팀장님이랑 단 둘이 남았잖아요.”
“그래요? 아 맞다, 고백은 잘했고?”
나는 그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 물었다.
“아니요. 수혁 팀장님 완전 철벽이에요. 저만 남겨두고 그냥 퇴근해 버리시던데. 전 밥도 못 먹고 10시까지 일했잖아요.”
“아…. 밥도 못 먹고 일한 거예요?”
“밥 못 먹은 게 중요한 게 아니죠! 그냥 나가셨다니까요. 유나 씨 가고 얼마 안돼서 바로요. 고백은 커녕 혼자 얼마나 무서웠는데.”
그녀는 그제야 속마음을 드러내듯 얼굴을 찌푸리길래 나도 공감하겠다는 듯 같이 얼굴을 구겼다. 그녀의 고백이 불발 되어 안심했지만 한편으로는 무언가 맞지 않아 찜찜했다.
그렇게 일찍 퇴근해 놓고 레스토랑에 오지 않았다고? 그럼 정말 의도적인 건가? 그의 복수였던 것일까. 마냥 그런 거라면 치졸하고 소심하기 짝이 없는 새끼다. 간장종지그릇 같은 마음으로 날 우롱해?
오후에도 나의 분노는 계속되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아직 오지 않았다. 누구도 그의 부제의 이유를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였다. 태민 씨가 헐레벌떡 뛰어 오더니 수아 씨의 어깨를 잡고 숨을 골랐다.
“수.. 수혁 팀장님 어제 퇴근하시다가 사고 나셨데요. 차.. 차 사고. 지금 병원이시라는데?”
“네?”
“네? 상태는요?”
그는 잘 모르겠다는 듯 머리를 부르르 흔들었다. 수아 씨가 먼저 병문안 가겠다고 서둘러 외투를 입었다. 나는 먼저 그렇게 해준 수아 씨가 고마웠다. 그래서 나도 태민 씨와 함께 덩달아 나갈 차비를 했다. 우리 셋은 약속이라도 한 듯 태민 씨의 차를 얻어 타고는 그가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나의 신경질은 이내 걱정으로 바뀌었고 그의 사고는 지난밤 혼자만의 실연의 아픔과 박탈감을 모두 상쇄할 만큼 너무나도 적절한 구실이어서 그로 향했던 분노는 화르륵 사그라들었다. 병원을 향해 가는 동안 나는 정말 수혁이가 잘못되기라도 할까 봐 걱정이 되었다. 그리고 어느새 눈물이 솟아올랐다. 나는 수아 씨와 태민 씨 몰래 그 감정을 참아내느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우리는 그를 단박에 찾아낼 수 있었다. 병원 침대 위에 누워 있는 그는 환자복을 입고도 여전히 훤칠했다. 그는 팔과 다리에 깁스를 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수아 씨가 수혁이의 몸을 이리저리 만지며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며 물었다. 수혁이는 몸서리치듯 두 팔을 가슴에 모았다.
“횡단보도에서 아이가 치일 뻔한 걸 구하려다가....”
그는 환하게 웃어 보였다.
“별 일 아니에요. 저는 그냥 타박상이고 아이도 괜찮고요. 걱정 끼쳐 드려서 죄송해요. 이렇게까지 오실 일은 아닌데.”
우리는 그제야 덩달아 웃었다. 그를 오해했던 지난밤이 미웠다.
“그럼 전화라도 하지 그랬어, 얼마나 기다렸…”
나는 따지듯 말하다가 여기에 수아 씨와 태민 씨가 있다는 것을 늦게야 깨닫곤 얼음이 되었다.
“유나 씨가 기다려요? 전화를 해요? 왜요?”
수아 씨는 나를 잡아먹을 것처럼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니요. 오늘 말이에요. 우리 모두 팀장님 안 와서 걱정했잖아요. 전화라도 주셨으면 우리가 굳이 여기까지 안 왔죠. 하하.”
수혁이는 산산조각이 난 핸드폰이 놓여 있는 협탁테이블을 가리켰다.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수아 씨는 여전히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보았다. 그녀가 무언가 자꾸 물어보려고 하자 태민 씨가 서두르듯 마무리했다.
“팀장님 봤으니까 저희는 이제 갑니다.”태민 씨가 수아 씨 어깨를 감싸고 나가면서 말했다.
“벌써요? 아니 왜….”
수아 씨는 우리 둘만 남기게 되는 것에 의아해하면서 태민 씨에게 끌려갔다.
나는 그의 옆에 앉았다.
“걱정했지?”
“큰일 나는 줄 알고.”
“나 깁스 풀면 다시 가자 보름.”
그는 침대위에 올린 내 손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