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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남 Oct 07. 2024

이럴 땐 한 없이 미련하지

[오늘 저녁 같이 할래? 7시에 보름에서 봐. 수혁]


나는 새어 나오는 미소를 애써 짓누르며 쪽지를 다시 고이 접었다. 그리고 지갑 속으로 정성스럽게 넣어두었다. ‘보름’은 파인 다이닝을 하는 유명한 레스토랑이다. 오래전부터 가고 싶었는데 수혁이와 함께 갈 줄이야! 

오늘 고백하겠다고 작정한 수아 씨에게 미안할 따름이었다. 나는 무언가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아 신나는 미소를 계속 짓고 있었다. 그것은 참을 수 없어 터져 나오는 표정이었다. 나의 이런 모습이 낯설었는지 눈치 빠른 태민 씨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에게 말을 걸었다. 


“유나 씨, 오늘 얼굴 좋아 보이네요?”

“저요? 그래요? 난 똑같은데?” 

“오늘 일도 많은데, 웃을 일이 뭐가 있어요? 뭔가 수상한데?”

“날이 많이 따뜻해졌잖아요.”


라는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스리슬쩍 하고 그러면 속아 주겠거니 했다. 날이 따뜻해지다니 더위에 허덕이며 걸어왔으면서. 나는 또다시 놀이공원에 온 아이처럼 흥분을 감출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태민 씨는 눈을 가늘게 뜬 상태로 나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나는 어깨를 한 번 들썩 거리고는 모르는 척했다. 어쩌면 은근슬쩍 눈치채주길 바랐을지도 모른다. 

나는 가장 커다란 비밀을 온 우주에서 나만 알고 있는 것 같아 행복했다. 점심시간엔 밥이 입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나는 배고픔도 모른 채 초흥분 상태였다. 

그 와중에 수아 씨의 머릿속도 분주해 보였다. 그녀의 계획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녀의 모욕감을 구경할 준비만 할 뿐이었다. 솔직히 말해 그녀는 태민 씨와 더 잘 어울렸다. 그러고 보니 태민 씨는 요즘 시무룩해 보였다. ‘화장실 너무 자주 가는 거 아니에요?’ ‘이거 틀렸잖아요.’라는 짜증 섞인 말로 괜히 나와 수아 씨의 트집을 잡았다. 하지만 나뿐만 아니라 수아 씨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게 좀 아쉬운 부분이었다. 


수아 씨는 그와의 대화가 더 이상 재미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가 무언가 열심히 설명하면 듣는 둥 마는 둥 했고 빨리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그 다른 주제는 수혁이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면 태민 씨는 못 들을 것을 들은 것 마냥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노골적이고 유치한 장면은 언제 보아도 재미있다. 수아 씨는 정말 원초적인 사람 같았다. 

수아 씨가 고백한 다는 말은 이제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아침에 받은 이온 음료 하나로 수혁이에 대한 믿음이 생겼을까. 내가 걱정되는 건 나와 수혁이와의 사귐이 비밀이 아닐 때 오는 후폭풍이었다. 만약 나와 수혁이가 사귄다는 소문이 돌면 민정우와 이준희가 사귀었을 때처럼 거센 비난은 나에게만 쏟아질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런 걱정은 점심 먹을 때 스치듯 했다. 그날따라 업무량이 엄청났기 때문에 다른 생각은 할 수 없었다. 기획안 제출 날짜가 다음 주에서 오늘 저녁으로 급하게 바뀌었고 그 때문에 모두 예민해졌다. 수혁 팀장님, 나의 수혁이도 일에 매진하느라 정신없어 보였다. 나는 그의 집중하는 모습을 몰래몰래 훔쳐보았다. 


“수혁팀장님, 도와주세요!”


수아 씨의 찌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눈은 모니터를 응시한 채 손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거의 마무리 단계에 있었던 서류를 잘못 클릭하여 날린 것이다. 그걸 다시 복구하려면 오늘 정시 간에 퇴근하는 것은 틀려 먹었다. 수혁이는 누구보다 침착하게 수아 씨를 안심시켰다.


“죄송해요 팀장님.”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고 눈물이 가득 담긴 눈으로 그를 응시했지만 수혁이는 그녀를 찬찬히 보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그런 그녀가 가소롭다는 듯 태민 씨는 얼굴이 일그러진 채로 나에게 ‘왜 저래?’라는 입모양을 만들어냈다. 그녀의 표정은 길 잃어버린 강아지 같았다. 그녀의 두 눈은 비에 젖은 듯 촉촉했고 당장이라도 가냘프고 불쌍한 그녀의 그 작은 고난에서 구원해 준다면 누구라도 히어로가 될 것 같은 상황이었다. 그녀는 의도된 고통에서 해방됐다는 명목으로 겸손히 감사해할 것이고 그 히어로에게 칭송의 말을 쏟아붓겠지. 그녀는 그 남자에게 성취감을 주고 히어로라는 명칭을 부여함과 동시에 자신의 사랑을 쟁취하는, 진부하지만 훌륭한 계획을 이룩하는 쾌거를 이룰 것이다. 그러면 안 넘어갈 남자는 거의 없겠지. 흥. 


‘이제 시작된 건가?’ 나는 이 주작이 그녀의 고백이 시작되는 것 같은 신호탄으로 들렸다. 이걸 이렇게 풀어낸다고? 회사에 타격을 주면서? 그녀의 이런 행각이 의도된 것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으나 의도된 것이라면 손뼉 쳐줄 만큼 대담했다. 하지만 그녀는 처참히 실패할 것이다. 


“일이 끝나신 분들은 먼저 퇴근하셔도 됩니다.”


퇴근 시간을 넘긴 다음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어나지 않자 수혁이가 말했다. 나는 부랴부랴 일을 끝냈다. 7시에 약속이 있으니. 난 그가 보라는 듯 벌떡 일어나서는 시끄럽게 책상 정리를 했다. 그래도 그는 일을 하느라 나를 바라보는 법이 없었다. 


“유나 씨 잘 가요. 저는 이거 해야 돼서.”


수아 씨가 약간의 미소를 머금은 채 그러나 아쉬운 듯 말했다. 나의 직감이 맞았다. 그녀는 이곳에서 고백할 참이었다. 나는 구경하고 싶은 욕구가 치솟았으나 다시 자리에 앉을 구실을 빠르게 마련하지 못해 그냥 인사했다. 이럴 땐 한없이 미련했다. 


“네, 수아 씨도 빨리 마무리하세요.”

“네.”


그녀가 윙크했다. 저런! 그녀는 나에게 신호를 보냈다.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어낸 후 태민 씨를 보았다. 태민 씨는 길게 한숨을 쉬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뒤로하고 어깨에 맨 가방 끈을 꼭 잡은 채 회사를 빠져나왔다. 수혁이는 날 좋아한다고! 


그리고 보름으로 향했다. 난 달이 그토록 아름다운지, 서울이라는 도시가 이렇게 반짝거리는지 처음 깨달았다. 


“안녕하세요. 예약하셨나요?”

“네…. 장수혁 씨로….”

“네 이쪽으로.”


호스트는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다는 듯 나를 안쪽으로 인도해 주었다. 제목을 알 수 없는 음악과 난해하지만 눈을 사로잡는 그림들, 따뜻한 해링본 모양의 나무 마루, 크림에 초콜릿 소스를 대충 섞어 놓은 듯한 마블 벽, 보석이 주렁주렁 달린 샹들리에까지. 그곳은 조용히 고백하기 딱 좋은 장소였다. 오 장수혁…. 많이 세련됐는데? 나는 표정을 최대한 숨기며 속으로 감탄했다.


그가 인도해 준 자리에 공주처럼 앉아서 나는 그곳 분위기를 더 즐겼다. 옆 쪽 테이블에서 먹고 있는 메뉴를 구경하기도 하고 창 밖으로 유유히 흐르는 한강을 하얌 없이 바라보기도 했다.  그를 기다리는 동안 그가 말을 할 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연습하고 있었다. 그래도 아직 6시 50분.


그를 기다리는 5분은 1시간 같았다. 성질이 급한 나는 그와의 만남에 너무 갈급한 나머지 나머지 5분은 기다리지 못할 것 같은 기분마저 들어 먼저 도착한 것에 후회를 했다. 아직 더 5분을 기다려야 하다니! 


하지만 앞서 기다린 5분은 긴 것도 아니었다. 그는 10분 20분 30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일이 아직 안 끝났나? 수아 씨가 그를 잡아 두고 키스라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오만가지 생각이 오고 갔다. 8시가 가까워지자 나는 슬슬 걱정과 동시에 화가 나기 시작했다. 이 녀석 나에게 복수하는 것인가!? 나는 갑자기 걱정이 되었다가 또다시 화가 났다. 그를 이해해 보려고 해도 이해되지 않았다. 문자 한 번 날리지 않은 그가 가소로울 뿐이었다. 여드름쟁이 장수혁 감히 네가? 난 참을 수 없었다. 저녁을 쫄쫄 굶은 채로 그냥 집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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