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남 Sep 30. 2024

요쿠르트 소동

유난히 더웠던 초여름 지각이라도 할까 봐 헐레벌떡 교실에 뛰어 들어왔다. 내 자리에는 냉장고에서 막 꺼내 차가운 물방울이 벨벳처럼 입혀 있는 요쿠르트 한 개가 올려져 있었다. 나는 어깨를 털며 가방을 벗어던져버리면서 옆에서 공부하고 있는 예나에게 외치듯 물었다. 


“이거 뭐야? 누가 줬어?”


하지만 예나는 두 어깨만 으쓱할 뿐이었다. 난 마침 뛰어서 3층을 올라왔고 굉장히 목이 말랐기 때문에 ‘일단은 마시지 말아야 돼, 네 것이 아닐 수도 있잖아’의 상식적인 생각을 가뿐히 뿌리치고 이미 그것의 뚜껑을 열고 있었다. 그리고 벌컥벌컥 마셔버렸다. 그건 아직도 정말 시원했다. 


탁! 나는 빈 요쿠르트 잔을 시원하게 내려놓았다.


“캬…. 천국이 따로 없구먼!”


그리고 쓰레기가 돼버린 요쿠르트 병을 버리려고 덜커덩 소리와 함께 박차고 일어났는데 예나가 갑자기 자신이 들고 있던 연필로 나에게 다시 앉으라는 듯 허공에 세로줄을 그었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뜨더니 연필로 나의 책상 서랍을 콕 집어 가리켰다. 그녀의 그런 동작은 참으로 요염하고 은밀해서 나는 호기심이 가득 찬 동그란 눈과 함께 거북목을 만들며 그녀에게 아주 조용히 속삭였다.


“왜?”


연필의 움직임은 더 강력하고 절제 있게 서랍 쪽을 가리켰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뾰족한 턱을 괴고선 내가 그녀의 지시를 따르나 안따르나 지켜볼 뿐이었다. 나는 슬로우 모션으로 천천히 앉아 서랍 안을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거기엔 작은 쪽지가 있었다. 종이를 길게 접은 후 끄트머리에서 세 번 접힌 모양의 쪽지였다. 나는 예나를 주시하며 쪽지를 열었다.


[요쿠르트 좋아할지 모르겠지만… 아침에 시원함을 전하며. 장수혁]


“우웨에에에에엑!”


나는 기괴한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잡고 있던 요쿠르트 병을 움켜쥐며 그것을 사정없이 구겼다. 나는 예나를 잡고 숨이 넘어가니 도와달라는 신호처럼 헛기침을 해댔다. 

그 글씨체는 너무나도 정갈해서 더 기분 나빴다. 정확한 궁서체에 연필에 힘이 잔뜩 들어간 것 같은 진한 글씨였다. 장수혁 같은 고지식한 글씨체였다. 예나는 내가 들고 있던 종이쪽지를 뺏어 읽더니 같이 소리를 질렀다. 


“야 뭐야 뭐야. 무슨 일이야.”


뒤늦게 온 수빈이도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나의 절망에 동참한다는 듯 쪽지를 가져가 찢었다. 나는 헛기침을 너무 해대서 지친 몸을 이끌고 교실 뒤편 쓰레기통으로 천천히 향했다. 마침 장수혁은 뒷문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보란 듯이 요쿠르트병을 쓰레기통에 던져 놓았고 수혁이는 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실실거릴 뿐이었다. 

장수혁. 덩치만 커다란 존재감 없는 아이. 그나마 덩치라도 작았으면 난 정말 그 아이의 이름조차 외우지 못했을 것이다. 같은 중학교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정보가 없다. 하지만 누군가의 말에 의하면 그는 금수저이고 서민 코스프레를 한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몰래 코웃음을 쳤다. 제발 서민 코스프레 하지 말고 금수저인지 다이아몬드 수저인지 드러내면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라도 생길 텐데 말이다. 


요쿠르트는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계속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하루는 예나에게 하루는 수빈이에게 그것을 주었다. 


“덕분에 시원하게 마셨다!”


그들은 키득키득거렸지만 난 같이 웃지 못하고 쓴 미소로 답할 뿐이었다. 그런데 날이 지날수록 요쿠르트에서 사과주스 그리고 포카리스웨트까지 업그레이드가 되고 있었다. 아니 이러다가 케이크도 사주고 밥도 사주고 가방까지 사주는 거 아니야?! 나는 포카리스웨트를 씹어 마셨다. 


안 되겠어! 작전을 바꿔야겠어. 나도 민정우에게 적극적으로 좋아한다는 표현을 해볼까? 이렇게 수혁이한테 당하다가 정말 사귀어버릴까 봐 겁이 났다. 


“나 있잖아.”

예나와 수빈이가 다소 격양된 나의 목소리를 듣고 내 코 앞까지 달려들었다. 


“나 민정우….”


그러고 보니 내가 민정우를 좋아한다는 얘기는 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주거나 맞장구 쳐주는 것이 다였다. 


“왜? 민정우가 왜?”

“뭔데 뭔데?”

예나와 수빈이는 인내심이 없다. 이 아이들은 기다리는 연습을 좀 해야 한다! 그들이 점점 닦달하자 난 조금 더 시간을 끌었다. 


“나 민정우. 아, 아니다 아니야.”

“뭐뭐뭐!!!!”


수빈이가 수학책을 던지며 화를 냈다. 수학책이 날아올 땐 좀 위협적이었지만 난 그녀의 난동이 너무 귀엽고 웃겼다. 

“나 민정우 좋아해.”


잠시 정적이 흘렀다. 예나는 크게 실망한 듯 얼굴을 구겼다.


“뭐야. 난 또 둘이 사귄다고.”

“왜? 왜? 놀랄 일이 아니야?”

“이미 다 알고 있었는데 뭔 소리래.”


헉! 이쯤에서 충격을 받은 건 그들이 아니라 나였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철저히 숨기고 다녔는데 어떻게 알았지? 민정우와 눈이라도 마주치는 날이며 하고 싶은 말이 백 개나 있었지만 난 꾹 참았다. 참고 또 참고 견뎠었다! 


“어… 어떻게 알았어? 내가 좋아한다고 얘기했었나?”

“저런 저런…. 얘기를 해야만 아나? 민정우 지나갈 때마다 실실거리고 민정우랑 같은 시간 버스 맞추려고 일부러 집에서 늦게 나오고. 어딜 가나 민정우 있나 없나 먼저 체크하고.”

예나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노동요처럼 리듬을 타면서 말했는데 그 모양이 꼭 우리 엄마 같았다. 


“야, 우리가 아침마다 민정우 소식 괜히 전하겠냐? 그리고 너 때문에 점심시간마다 운동장 가서 앉아 있는 거야 이것아. 몰랐어?”


수빈이의 말투는 더 여유 있었다. 그것도 몰랐냐는 말투로 새삼 어른 같이 굴었다. 나는 한순간 우롱당한 느낌이었다가 이내 큰 짐을 덜어낸 것과 같은 자유함을 느꼈다. 그들의 남자를 뺏을 수도 있겠다는 죄책감 같은 것도 사라졌다. 


“그래도 이제야 솔직히 말해줘서 고맙다. 안 그랬으면 너 우리한테 정말 쪽팔릴 뻔했다. 좋아하는 거 다 티 내면서 아닌 척하는 건 겁나 쪽팔리는 짓이야. 나 그런 애들 참 한심하더라. 보는 내가 다 창피하고 말이야.”

수빈이는 나의 치밀했던 연기를 간파하고 있었다. 앗. 창피해. 그러고 보니 이제라도 말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너… 너네가 좋아한 거 아니었어?”

내가 조심스럽게 묻자 그들은 서로 한 번 쳐다보고는 박장대소를 했다.


“나 민정우 같은 애 싫어. 희멀건한애는 별로야.”수빈이가 머리 끈을 돌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 엄마가 고등학교 때 남자 사귀지 말래. 대학 가면 더 괜찮은 남자가 수두룩 하데.”뾰족한 턱을 괸 예나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나는 그제야 지난날, 민정우와 함께할 수 있었던 순간들이(축구하는 것 구경,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치기, 점심시간에 그의 근처에서 밥 먹기 등) 모두 그들의 갸륵한 계략임을 깨달았다.  


너희들의 큰 듯이 있을 줄이야. 세상에 이런 우정이 다 있을 수 있을까. 나는 그들을 부둥켜안고 방방 뛰었다. 그러다가 예나가 뛰는 걸 멈추고 갑자기 속삭였다. 


“야, 야, 이럴 때가 아니야. 유나가 이렇게 커밍아웃을 했으니까 우리가 좀 더 적극적으로 도와주자.”

“아니야 아니야. 나 적극적인 거 안 할 거야!”

“무슨 소리야! 그냥 짝사랑만 한다고?”

“응 나 짝사랑 좋아해. 안 해 안 해.”


뭐야, 괜히 말했잖아. 내가 이럴 줄 알고 말 안 한 거라고. 나는 그들이 대신 가서 고백이라도 할까 봐 무서웠다. 적극적인 표현은 보수적인 나의 성향과 절대 맞지 않는다. 나는 결코 없어 보이고 싶지 않았다. 


“야! 있어 보이는 게 밥 먹여 주냐? 사랑은 쟁취하는 거야!”

“요쿠르트라도 갖다 줘봐.”

이 녀석들 독심술이라도 하나 봐. 무서운 소녀들. 난 이 대화를 빨리 끝내고 싶었다. 예나와 수빈이는 두 손가락으로 자신들의 눈과 나를 번갈아 가리키는 행동을 하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이런…. 망했….’


무슨 재밌는 예능 쇼라도 생긴 것처럼 그들이 더 들떠 있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기사 쪽팔리는 건 내 몫이고 그들은 구경꾼일 테니. 하… 역시 말하지 말았어야 됐다는 생각이 머리를 짓누르자 이마를 책상에 콕 박았다. 


다음날 예나와 수빈이는 친히 음료수를 준비해 두었다. 그가 있는 1반으로 같이 가서 그의 책상 위에 놓고 오면 된다는 것이다. 그들에겐 1반으로 향하는 복도가 재미있는 기행이 될 것이다. 마음 졸일 난 아니겠지만. 하지만 어느새 나도 적극적인 표현을 해서 나쁠 것이 없다는 것에 설득되어 가고 있었다. 인생 한 번이지 두 번이냐. 짝사랑해서 뭐 할 건데.라는 메시지를 주기적으로 들으면 그게 맞는가 보다 싶다. 이래서 친구를 잘 사귀라고 했는데. 잘하고 있는 건진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우리는 1반으로 향하고 있다.

나는 어쩌다 그와 마주칠 수 있을까 봐 앞머리를 다시 다듬었다. 1반이 가까워질수록 심장소리는 터질 듯이 커졌다. 1반은 우리 반 보다 더 어수선했다. 


“저기다!”


예나가 가리킨 곳은 민정우 책상이었다. 예나가 한 번에 알아챈 게 신기하다고 생각이 들 즈음, 나는 절망했다. 그곳은 누가 봐도 민정우 자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전 02화 꼴값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