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송재윤. 내가 말한 핸드폰 케이스 가져왔어?”
아침부터 도진이의 채근이 시작됐다. 해맑은 눈동자로 어울리지도 않는 독촉을 하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난다. 오늘은 또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는지 봐야겠다.
“빨리 내놔. 내 핸드폰 새 거라서 빨리 껴야 한단 말이야.”
“무슨 소리야? 웬 핸드폰 케이스?”
“네가 어제 주겠다고 했잖아.”
“내가 언제?”
“학교 끝나고 다연이랑 버스 정류장 가면서. 뭐야. 안 주려고 기억 안 나는 척하는 거야?”
나는 정말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 그러고 보니 이상하다! 어제 학교 끝나고 어떻게 집에 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리 아무리 생각해 봐도 실마리조차 잡히지 않는다. 기억이 삭제되었다. 무슨 일일까. 타임루프를 통해 그때로 다시 가봐야겠다.
“조심해!”
“뭐를?”
도진이가 놀라서 묻는다. 교실에 있는 모든 학생의 시선이 나와 도진이에게 꽂혔다. 나는 시간을 되돌리지 못했다. 무슨 일이지?
“왜 이러지?”
“뭐야. 뭐가. 얘가 왜 이래.”
어제부터 이상하다. 빨간 모자 여자부터 다연이의 수상한 질문까지. 게다가 기억 상실이라니! 타임루프가 끝난 거야? 난 이제 다시 시간을 되돌릴 수 없는 걸까! 이렇게 허망하게 써버리다니! 눈물이 날 지경이다. 로또 번호도 열 번은 더 알아내야 하고, 대학 수능 점수도 만들어야 하는데! 이렇게 그냥 끝나버린 것일까! 그저 다연이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쓸데없이 낭비해 버린 그 시간들? 아니. 쓸데없진 않았다. 하지만 이게 정말 끝이란 말인가!
도진이는 심각해진 내 얼굴을 보더니 핸드폰 케이스 따위 주지 않아도 되니까 무슨 일이 있는지 말해 달라고 했다. 나는 걱정하는 도진이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저 순진무구한 얼굴은 걱정하는 표정도 웃기다고 생각했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학교를 빠져나왔다. 나는 오늘 아침, 그러니까 등교시간을 생각하며 다시 ‘조심해’를 외칠 예정이다. 이번에도 되지 않으면 나의 타임루프 능력은 끝난 것이다. 나는 백 미터 달리기를 하듯 운동장을 가로지르며 외쳤다.
“조심해!”
버스 안.
다행이다. 오늘 아침으로 다시 되돌아왔다. 하지만 어제로 돌아가는 건 왜 하지 못했고 오늘 버스 안은 왜 돌아올 수 있었을까. 제한이 걸린 것일까? 게다가 난 왜 아직도 어제 학교 끝난 시간에 내가 도진이에게 핸드폰 케이스를 주겠다고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일까. 갑자기 두려워졌다. 나는 교실에 도착하자마자 도진에게로 갔다.
“어제 내가 너한테 준다던 핸드폰 케이스의 정체는 뭐야?”
“아이고, 깜짝이야! 정체가 뭐긴 네가 나한테 새거 사준다며. 가져왔어?”
“내가? 너한테? 굳이 새 거를?”
“참나. 내 거 뺏어갔잖아!”
“내가? 그건 내가 할 짓이 아닌데. 왜?”
“너 왜 그래? 케이스 주기 싫어서 지금 기억 잃은 척 메소드 연기 하시는 거세요?”
“아니. 내가 굳이 너의 핸드폰 케이스를 뺏고 나서 왜 새것을 준다고 했느냐 말이야?”
“그걸 잊어? 다연이가 핸드폰 떨어뜨려서 박살 났는데 내 케이스를 강제로 뺏어가더니 다연이한테 급한 대로 주고 나한텐 새거 사준다고 그랬잖아. 기억 안 나?”
“아…. 그랬어? 그러니까 미안한데 전후 사정을 더 말해줄 수 있어? 더 자세히 말해봐. 다연이가 왜 핸드폰을 떨어뜨렸는데?”
도진이는 잠시 이상한 눈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멋쩍어하며 머리를 긁적 거렸다. 뭐야. 더 불안하게 왜 이러는 거지.
“아… 참. 내가 일부러 보려고 해서 본건 아니고….”
뭘 봤다는 거야? 왜 뜸 들이는데! 나는 왜 도대체 하나도 생각이 안 나는 거냐고! 손에서 식은땀이 났다.
“뭔데? 왜 말을 못 해?”
“이게 또. 너의 프라이버시인데 내가 훔쳐본 것 같으니까 민망하잖아.”
“프라이버시?”
설마 내가 이상한 짓이라도 다연이랑 했다는 건가? 학교 앞인데? 대범하게? 하지만 우린 그럴 정도로 긴밀한 관계는 아니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나의 표정을 보자 도진이는 답답했는지 ‘아오!’라며 짧은 한탄과 함께 빙그르 돌았다. 나야말로 돌아버리겠네.
“그러니까. 학교 끝나고 나도 학원을 가려고 그 버스 정류장 있지? 너희들의 만남의 장소. 그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고. 알잖아. 내가 다연이랑 같은 학원 다니는 거.”
“그렇지.”
“아니나 다를까 저 앞으로 너희 둘이 걸어가고 있더라. 너는 그… 흠. 뒷짐을 지고 있었고. 그러다가 오른손이 다연이 뒤에서 자꾸 왔다 갔다 하는 거야. 다연이랑 손을 잡을 타이밍을 노리는 것 같더라고. 그때 다연이 손을 잡으려고 했는데 다연이가 너랑 손이 닿자마자 기겁하고 놀라더니 다른 손에 있던 핸드폰을 땅에 떨어뜨린 거지. 핸드폰은 박살이 났고. 마침 너는 너희들을 지나가는 나를 보았고 너는 나의 뒷덜미를 무자비하게 잡더니 불러 세워놓고, 핸드폰 케이스를 강제적으로 뺏어서 다연이에게 주었어. 핸드폰 뒷면에 깨진 유리 조각에 찔리면 안 된다고. 그리고 나한테 새거 사준다고 걱정 말라고 그랬잖아. 그러니까 네가 나한테 줘야지 핸드폰 케이스.”
내가 손을 잡으려고 했었다고? 이렇게 중요하고 강력한 이벤트의 기억이 내게 왜 없는 거지? 게다가 실패했다면 내가 타임루프를 다시 했을 텐데 말이다.
“어… 그 그래. 내가 깜박 잊고 있었네. 음. 오늘 꼭 사서 내일 갖다 줄게.”
“꼭 줘라!”
“어 미안.”
“근데 뭐야. 왜 식겁한 표정이야? 식은땀도 나네? 야 누가 보면 내가 너한테 물건 뺏는 줄 알겠다.”
“어 나. 조퇴해야겠어. 속이 좀 안 좋네. 장염인가.”
“어. 집에 가라. 아프다고 핸드폰 케이스 사는 거 잊지 말고.”
지워진 과거. 타임루프로 갈 수도 없는 과거는 무엇일까.
<그래 데자뷔 말이야. 실제로는 처음인데, 과거에 했었던 거 같은 그런… 느낌.>
그녀도 타임루프를 알고 있는 것일까? 이럴게 아니라 그녀에게 전화해서 어제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보면 된다.
“다연아. 너 핸드폰은 괜찮아?”
“응 수리 맡겼더니 그날 밤에 바로 나왔어. 오늘은 학교에서 못 봤네?”
“어. 어. 아파서 조퇴했어.”
“그래 쉬어.”
도진이의 기억이 맞았다. 다연이가 핸드폰이 깨진 사건을 기억한다. 그러다가 나는 돌연 소름이 돋았다. 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다연아. 저기….”
“응.”
“우리 지금 이 대화. 처음 아니지?”
“응?”
“왜 이 대화를 여러 번 반복한 것 같은 느낌이 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