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승연애의 조건: 악역

by 봄남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벌써 퇴근 시간이 왔다. 그녀는 자신이 생각 보다 그의 존재를 중요하게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무너져 가는 마음을 느끼고 나서야 깨달았다.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집에 도착할 때까지 그녀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정현 씨에게 인사는 하고 온 것일까. 책상은 정리하고 온 것일까.


집에 도착했는데 집 앞에 웬 성인 남자가 입구 계단에 걸터앉아 있었다. 늦은 밤이라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여차하면 신고를 할 참이라 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다가갔다. 그는 다름 아닌 진혁 씨였다. 술에 취해 있었다. 그녀가 그를 흔들어 깨우자 그는 눈을 천천히 떴다. 그리고 그녀를 똑바로 응시했다.


“사귈래요?”




****



다희는 진혁의 고백을 받고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술이 취한 그에게 대답할 수 없는 노릇이라 무거운 몸을 부추기고 택시에 태워 집에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침대에 누워서 그의 고백을 곱씹었다. 생각만으로 두근거렸다. 진혁은 바늘을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첫인상은 차갑고 목소리는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일에 대한 지식이 누구보다 많아 모르는 것이 있으면 그에게 물어보았다. 그가 그녀를 수줍게 보고 있다는 생각은 기분 나쁘지 않았다. 그의 생각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어느덧 그녀의 일상이 되었었다.





문제는 남자 친구가 있다는 사실에 마냥 설렐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때마침 경고라도 하듯 문자 진동 소리가 세차게 울렸다.


‘주말인데 어디 가고 싶은데 없어?’


그녀는 그의 문자를 보고 얼굴이 굳어졌다. 그리고 그저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기만 할 뿐 쉽사리 답문을 보내지 못했다. 이번 기회에 만나서 헤어지자고 해야 하나. 이 남자는 내가 믿고 갈 사람인가?라는 온갖 생각에 사로 잡혀 밤을 꼬박 새웠다.




남자 친구와 예전부터 가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어서 못 갔던 레스토랑에 가기로 했다. 멋스러운 테이블에 앉아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그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익혀 두기라도 하듯 꼼꼼히 보았다. 셔츠와 면바지를 잘 골라 입은 그는 여전히 멋졌다. 새삼 그의 얼굴이 잘생겼다고 느껴졌다. ‘뭐야. 이제 헤어지려니 또 뭐가 아쉬운 거야?’ 그녀는 이기적인 감정 요동에 잠시 지긋지긋해졌다.


식사를 하는 동안 많은 말을 하진 않기로 했다. 그러다간 그녀의 결심이 흐지부지 될 것만 같았다. 그날따라 한 입도 제대로 못 먹는 그녀를 보고 그는 새삼 해맑게 물었다.


“왜 맛없어?”


그녀는 다이어트중이라며 말을 잘랐다. 디저트로 커피와 조각 케이크가 나왔다. 그녀는 커피를 마시는 척하다가 잔을 내려놓았다.그리고 커피 잔을 두 손으로 꼭 쥐고 결심하듯 말했다.


“주찬아 우리 헤어질까?”

“………왜?”

“………….”

“…………. 싫은데?”


그가 들고 있던 유리컵이 심하게 흔들렸다. 그는 그녀에게 다른 남자라도 생겼냐고 물었다. 8년이나 같이한 세월인데 거짓말 같은 건 이 남자에게 통하지 않는다.


“아니.”

“그럼?”

“좋아하는 남자가 생겼어.”




한참을 생각하던 그는 화가 났는지 붉게 물든 얼굴을 하고 연신 한 숨을 쉬었다.


"왜?"


왜라니. 헤어지는 마당에 너보다 잘나서, 너보다 잘생겨서가 다 무슨 소용일까 싶어 쉽사리 말이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주찬보다 잘나지도 잘생기지도 않았잖아.


".... 모르겠어."

"다희야. 그동안 내가 너무 무심했지?"

"...."

"내가 앞으로 더 잘할게."

"...."

"싫어. 내가 싫다면?"



그는 이후로도 한 동안 애원해 보다가 그 새끼가 누구냐며 따지면서 화 내기를 반복했다. 다희는 고통스러웠다.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쨍그랑!


그가 테이블 위로 주먹을 내리 치는 바람에 유리컵이 떨어져 깨졌다. 직원이 와서 깨진 유리잔을 치우느라 분주했고 다희는 그의 표정을 보고 손가락도 움직일 수 없었다.



레스토랑을 먼저 나간 건 주찬이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이상한 타이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