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씨네 부부는 가을 씨의 남편의 지인인 진혁 씨와 오랜만에 만났다. 미리 약속한 것은 아니었는데 진혁 씨가 남편에게 만나고 싶다고 갑작스럽게 연락을 했다. 저녁 시간이 지난 늦은 밤이었지만 가을 씨는 너무나 흔쾌히 집으로 오라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가을 씨도 참으로 아끼는 동생이었기 때문이다. 신혼 때 보고 거의 8년 만에 처음 보는 것 같다. 진혁 씨는 그간 살도 많이 쪘고 나이가 보이는 얼굴로 변했는데 그 안에 있는 마음과 말투 그리고 생각은 여전히 순수하고 착했다.
이런 가정집에 초대받아서 오는 것이 처음이라고 하는 그는 집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다이닝 룸에 있는 식탁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식탁에는 이미 가을 씨가 차려준 밥상이 있었다. 편하라고 일부러 신경 썼는데 오히려 부담감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고 가을 씨는 생각했다. 늦은 저녁 식사를 하며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대화가 오갔다.
대화를 할수록 가을 씨네 부부는 진혁 씨가 솔직한 사람이며 예민하게 자기반성을 할 줄 아는 친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를 서슴없이 꺼내 놓을 정도로 가을 씨 남편과의 관계가 두터웠다. 가을 씨네는 그가 솔직하면 솔직할수록 그에 대한 민망함이나 창피함 보다는 감사함이 더 컸다. 그런 솔직한 대화는 그들 모두에게 해방을 줬다. 대화의 진행은 빠르고 흥미로웠다. 그들은 서로 억지로 웃거나 듣는 척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통했다. 진혁 씨는 가을 씨의 이야기가 끝나기도 전에 물을 마시다 말고 컵을 내려놓으며 공감의 의미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또한 앞서 말하기도 하면서 굉장한 직관력을 내비쳤다.
“어쩐지 그 부부는 없더라...”
라고 진혁 씨는 본인의 짐작이 맞았다는 듯 팔을 꼬며 등을 의자에 기대기도 했다. 그런 모습에 가을 씨네 부부는 크게 박수를 치며 웃었다. 그의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에서 개구쟁이 같은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 시간 그 공간만큼은 다른 사람들은 넘볼 수 없었던 그들 만의 요새가 되었다. 아직 아이가 없는 그는 잠깐 인사하고 간 가을 씨네 아이들을 보며 새삼 신기해했다. 그는 턱을 괴고 부끄러워서 방으로 숨어버리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얼마간 말없이 지켜보았다.
늦은 밤까지 이어진 대화에 서서히 피곤이 몰려왔을 무렵 진혁 씨가 먼저 남편이 내일 아침 일찍 출근해야 하지 않느냐며 집에 가겠다고 했다. 가을 씨네 부부는 절로 나오는 하품을 참느라 고생하긴 했지만 쉽사리 끝내고 싶지 않았던 시간이어서 아쉬웠다. 그가 차에 탈 때까지 배웅해주고 집으로 돌아왔다. 바깥 날씨가 쌀쌀해서 가을 씨는 남편을 끌어안고 발을 동 동 굴렸다.
“옛날 얘기가 재미있어지는 것을 보니 우리가 늙긴 했나 봐.”
라고 남편은 쓸데없이 그들의 나이를 실감하게 했다. 그리고 그녀는 이런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손님을 치를 수 있다는 사실에 매우 뿌듯해했다. 평상시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에너지 비축을 위해 밖에 잘 나가지도 않는 그녀는 본능적으로 인간관계에 대한 막연한 갈망이 있었나 보다. 그리고 이렇게 누군가를 초대하면서 사회적 욕구를 충족했으며 굉장히 즐기게 됐다는 것도 알게 됐다. 누군가에게 맞장구 쳐준다는 것, 그리고 그럴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 그들의 마음을 공감한다는 것은 많은 화학적 과정의 집합체였다. 정신 건강에 좋았다. ‘홀로’를 지향하지만 동시에 ‘함께’에 대한 갈증도 있다는 것을 그녀는 깨달았다. 이러한 간극 덕분에 그녀의 지향점이 생겼다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