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00원짜리 지우개

by 봄남


“… 내 지우개 줄래?”

“이따가 줄게.”


오늘도 희민이는 지우개를 빌려 달라고 했다. 희민이는 6학년 새 학기 때 처음 만난 친구인데 그녀는 학기 초부터 줄곧 지우개를 상습적으로 빌려가서 돌려주지 않곤 했다.


소은이는 화가 났지만 희민이와 지우개 빌려 가는 일로 괜한 말다툼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희민이가 아무렇지도 않게 지우개를 가져갈 때마다 늘 무력감에 사로잡혔다.



학교가 끝난 후 소은이는 문구점에 가서 지우개를 열개나 샀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 중에 최선이었다. 하찮은 지우개 하나로 신경질 내는 건 아무래도 속이 좁아 보일 것 같았다.


“소은아 지우개 저번에도 샀잖아, 또 사는 거야? 지우개를 왜 이렇게 많이 사?”

옆에서 소은이를 지켜보던 엄마가 말했다. 소은이는 옆에 있는 핑크색 형광펜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쟁여 두는 것도 나쁘지 않지.”

“준비성이 철저하네.”


엄마는 별일 아닌 듯 말했지만 소은이는 알 수 없는 감정에 얼굴이 굳어졌다. 거슬렸다. 엄마를 속일 생각은 없었는데 왜 저런 말이 나왔는지 소은이 자신도 잘 이해되지 않았다.


엄마는 가끔 소은이에게 못되게 구는 친구를 다그쳤는데 대부분의 경우 그것이 힘이 되기는커녕 그녀에게 무안만 안겨줄 뿐이었다. 엄마의 질책에 민망해할 친구의 마음이 더 신경 쓰였던 것이다.


그게 어떤 마음인지 소은이는 잘 몰랐다. 엄마의 변호가 없으면 안 되지만 혼나고 있는 친구를 바라보는 것도 힘들었다.


다음날 아침, 그녀는 좀 더 편한 마음으로 희민이를 마주할 수 있었다.


“지우개 좀 빌려줘.”

“여기.”


희민이는 휙 돌아서 버렸다. 그리고 그 지우개쯤이야 잃어버렸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편해졌다.


‘나도 이제 육 학년이라고. 엄마는 상관할 필요 없어…’


그 이후로도 몇 날 며칠 지우개 헌납은 계속되었다. 사건은 일주일 후에 벌어졌다. 지우개를 빌려간지 몇 시간이 채 되지 않았는데 희민이가 소은이에게 또 찾아왔다. 그녀는 소은이의 앞자리에 경쾌하게 걸터앉으며 말했다.


“소은아, 지우개 좀.”

“아까 빌려갔잖아?”

“응 나 그거 잃어버렸어. 미안해.”

“......”


아무렇지도 않게 빌려달라고 하는 희민이의 밝은 표정이 소은이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간에 쟁여 놓은 분노가 곧 터질 것 같았다. 그녀는 분노를 머금은 눈빛을 쏘아대며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없어.”

“응 그래.”


희민이가 아무렇지도 않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있었다.


‘뭐? 그게 다야?’


소은이는 희민이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희민이의 잡힌 손을 응시하며 말했다.


“지금껏 가져가서 돌려주지 않은 내 지우개 내놔.”

“뭐?”

“매일 가져간 내 지우개. 하나에 500원. 한 달이 넘었으니까 8000원어치 내 지우개.”

“차... 암나.”

“참나?”


소은이가 천천히 마주 보며 일어 서자 희민이가 몸을 뒤로 저쳤다. 희민이보다 키가 큰 소은이는 희민이를 아래로 내려 보았다. 희민이는 넘어질 듯 한 자세를 고쳐 대며 눈을 빠르게 깜박거렸다. 보고 소은이는 손목을 더 세게 잡았다.


“야.. 쳇! 왜 그래...”


희민이가 목청을 높였다. 그리고 흔들리는 눈동자를 숨길 순 없었다. 소은이가 희민이의 얼굴에 다가가 눌러 담은 분노가 새어 나오듯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까지 팔천 원 가져오지 않으면 즉유브린다.”

“아!!!!”


희민이는 다른 친구들을 보며 괜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친구들의 따가운 시선만 되돌아올 뿐이었다.


“대답해.”

“아.. 알았어! 이거 놔!”

“팔천 원이다.”

“알았어, 알았어, 알았다고.”


소은이가 손목을 놓자 희민이는 서둘러 자기 자리로 도망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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