믹스커피 좋아하면 안 되나요?
아침에 일어나면 믹스커피 타임을 갖는다. 그런 다음에 좋아하는 커피 캡슐을 골라서 커피머신에 넣고 진하게 아메리카노를 내린다. 연이은 두 잔 커피를 마시는 걸로 일과는 시작된다.
언제부터 그랬는지 거슬러 올라가면 엄마로부터 시작된 전통이다.
엄마는 일어나서 제일 먼저 커피포트에 물을 올린다. 마음에 드는 잔에 펄펄 끓인 물을 쪼르르 부은 다음 믹스커피 봉투를 ‘톡’ 뜯어서 털어 넣고 티스푼으로 젓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런 엄마를 똑 닮은 우리 자매는 포트에 물 끓이는 소리에 아침을 실감했다.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채 “엄마, 나도.” 그러면 저쪽 방에서 “엄마, 나도.” 같은 말을 하고는 했다. 모녀들은 커피 한잔에 도란도란 모여서 달콤한 믹스커피를 마시며 아침을 맞이했다. 엄마 덕분에 시작된 믹스커피 타임은 아빠에게도 옮겨졌고, 아빠가 먼저 일어나는 날에는 엄마가 좋아하는 컵 위에 믹스커피 봉지를 가로로 눕혀 올려놓고는 했다. 마치 ‘우리 아내 것’이라고 표시해 둔 것처럼. 언니와 나는 “이건 찐 사랑이야.”라고 했으나 엄마는 손을 휘휘 저으며 “이게 무슨 사랑이야?”믿지 못한다는 말과는 다르게 아빠가 믹스커피 봉지를 놓아둔 컵을 매번 사진으로 찍었다. 시간이 지나서 아빠가 없는 지금, 엄마는 “사랑이었네.”라며 씁쓸하게 웃었다.
믹스커피 한잔에 아침이 여유롭고 다 마실 때 즈음 에너지가 생긴다. 그러다 보니 남편도 우리 집 전통을 이어받아서 일어나면 믹스커피로 잠을 쫓아낸다. 요즘처럼 더운 날에는 얼음을 동동 띄어서 아이스 믹스커피를 즐겨 마시고 “크으.”하고 감탄하는 소리를 낸다. 술을 한 잔도 안 마시는 사람이 커피를 마실 때 이런 소리를 내면 웃음이 난다. 그리고서 커피머신 앞에서 캡슐을 고른 뒤 곧바로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우리는 커피로 점점 닮아가고 있다.
어느 날, 티브이에서 도시적인 이미지의 여배우가 “저는 믹스커피를 좋아해요.”라고 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마신다며 수줍게 말하는 모습에 내적 친밀감이 밀려왔다. 세련된 외모와 다르게 구수한 커피 입맛을 가진 그녀. 그때부터 김소연 배우는 내게 ‘언니’라는 호칭으로 바뀌게 되었다. “너는 안 어울리게 믹스커피를 마시니?” 큰 외숙모가 했던 말이 가끔 떠오를 때면 소연 언니도 좋아하는 믹스커피! 를 말하지 못해서 아쉬운 마음이 든다. 이제는 나도 “커피를 매우 좋아하고요, 믹스커피도 좋아합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다닌다.
실은, 단맛이 조금이라도 느껴지는 커피는 질려서 잘 못 마신다. 그래서 카페에 가면 거의 아메리카노만 먹는데 믹스커피를 좋아한다는 게 미스터리다. 추억과 습관이 버무린 맛에 중독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일어나기 힘든 아침에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마법 같은 믹스커피.
여유를 부리며 한 잔 마시고 엄마한테 전화를 걸어본다. 이미 아침에 커피를 마셨으나 딸의 전화에 “엄마 물 좀 올리고 올게.”라며 기꺼이 수다를 맞이하는 엄마는 어쩌면 이런 이유로 믹스 커피 한 잔을 더 마실 수 있는 게 기쁜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믹스커피 봉지를 보면 아빠 생각이 난다고 하셨고, 나는 믹스커피만 보면 엄마 생각이 난다.
엄마의 커피잔 위에 아빠가 살포시 놓아둔 믹스커피 봉지가 사랑이 아니면 뭐가 사랑일까.
믹스커피 생각을 하다 보 돌아가신 외할머니 생각이 난다. 커피는 ‘초이시!’라고 하셨는데
외할머니도 믹스커피를 좋아하셨을까? 그렇다면 이 전통은 외할머니로부터 내려온 걸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