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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혜샘 Feb 23. 2020

카뮈의 '페스트', 재난에 드러나는 3가지 인간 유형

소설 '페스트'를 통해 본 코로나 19 시대

알베르 카뮈


'코로나 19'로 사회가 혼란에 빠졌다.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전염자수와 안타까운 사망자 소식에 날로 공포가 확산되어 간다. 이 시기가 길어질까 봐 많은 이들이 걱정하고 있다.


카뮈의 소설 '페스트'. 다시 꺼내 읽은 이유


‘60매에 20만 원이 넘는 마스크. 불과 닷새 전에는 3만 원대 였다.’(2020.1.31. 연합뉴스 tv)

"코로나바이러스 나가".. 프랑스서 혐오 대상 된 동양인(2020.2.20. 세계일보)


최근 뉴스와 신문에 등장한 기사 제목들이다. 이런 세태에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소설이 있다.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 (더클래식, 2014)'이다. 요즘 돌아가는 양상과 책 속 이야기가 적잖게 겹쳐있기 때문이다.



프랑스령 알제리를 배경으로 한 재난 소설


페스트는 카뮈의 대표작 중 하나로 1940년대 프랑스령 알제리를 배경으로 한 재난 소설이다. 소설은 해안 도시 '오랑'에서 발생한 '흑사병(페스트)'이 점차 도시를 공포로 마비시키는 과정을 그린다. 도시는 급기야 외부로부터 고립된 채 하루 수백 명의 사람이 죽고, 이런 상황은 1년이나 계속된다.


페스트에 등장하는 3가지 인간 군상


전염병이 창궐한 도시에서 펼쳐지는 1년간의 이야기 속에는 야비한 인간, 냉담한 인간, 의로운 인간 등 다양한 인간 군상이 등장하는데 그를 대표하는 세 인물은 각각 '코타르', '파늘루', '리외' 다.


1) 야비한 인간(코타르)


'코타르'는 공동체적 고통을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취하는 행태를 보인다.

그는 도시가 재난으로 기능이 마비된 것에 안도한다. 자신이 저지른 범죄가 '페스트'로 인해 묻히고 체포가 미뤄졌기 때문이다. 또한 기회를 활용하여 '코타르는 장사가 잘되었고 자질구레한 투기로 돈을 벌었다(60p )'.  '자신이 페스트를 원한 것이 아니라 그냥 벌어진 일이고 패스트 덕분에 당장은 자기 일이 잘되는 것은 자기 잘못이 아니라고 항의(합리화)(39p)'하는 코타르는  공동체적 위기를 실리적 도구로 삼는다.


위에서 언급한 마스크 폭리 이야기의 경우를 예로 들 수 있다.  수요의 폭발적 급증에 비해 공급이 부족하므로 불과 얼마 전까지 3만 원짜리가 약 7배가 오른 20만 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요즘 온라인 사이트에서는 한 장에 300원 하는 마스크를 1만 원에 판다고도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수요와 공급에 따라 가격이 정해 지는 것은 당연하다는 이야기는 공동체의 고통에 대한 성찰이 배제된 '코타르적 합리화'이다. 뿐만 아니라 코로나 관련 가짜 뉴스로 클릭을 유도하여 이익을 취하는 '스미싱', 각종 보험 조직단의 '공포 마케팅'의 기승 또한 마찬가지다.


출처:jtvc뉴스룸 


2) 냉담한 인간(파늘루)


파늘루는 학식 있고 존경받는 예수회 신부이다. 그는 페스트가 창궐하게 된 이유를 '인간의 죄악'때문이라고 규정한다.


"이제 여러분은 죄가 뭔지를 압니다. 카인과 그의 후손들이, 노아의 대홍수 이전의 후손들이, 소돔과 고모라의 후손들이, 파라오와 욥, 모든 저주받은 자들이 그것의 정체를 알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25p, 파늘루 신부의 설교 중)


페스트는 노아의 홍수와 같은 신의 심판이라는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공포에 빠진다. 종교가 사람에게 구원과 해방이 아닌 구속과 억압이 되는 장면이다.


파늘루 신부가 이렇게 설교하게 된 것에 대해 주인공 '리외'는 여기에 대해 이와 같이 말한다.


"파늘루는 연구자입니다. 그는 사람이 죽는 것을 많이 못 봤기 때문에, 
진리의 이름으로 말하는 겁니다. " (31p)

사람이 죽는 것의 문제로 들어가면 어떤 추상적, 관념적 이념은 무너진다. 우리가 죽어가는 사람을 볼 때 내편 네 편을 가를 수 없듯 말이다. 그럼에도 사회에 각종 혐오를 부추기는 것은 이런 파늘루적 냉담 즉 추상적 잔인함과 맞닿아 있다. 냉담한 마음은 자비가 결여된 이성의 결과다. '냉담함'은 쉽게 인간을 재단하며 편 가르기를 한다. 파늘루 신부가 죽어가는 사람들을 '신의 심판'의 결과라며 그들을 '악인'의 자리로 몰아내었듯 말이다. 지금 사회에 번지는 '혐오'가 바로 그 '냉담함'의 결과다. 인간을 '체'로 보지 못하고 '추상'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프랑스에서 일어난 '일식 레스토랑 페인트 테러 사건'을 보면서 혐오가 불러일으키는 반 이성의 (비인간성)의 조각을 보았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이번 코로나19확산과 관련하여 특정 지역이나 종교의 혐오를 부추기는 각종 기사와 댓글들을 통해 인간 안에 잠재된 파늘루적 냉담이 얼마나 뿌리 깊은 것임을 보게 된다.


페인트로 쓰여진 '코로나 바이러스'  프랑스 동양인 식당 페인트 테러.(출처: 서울신문)

 


3) 성실한 인간(리외)


"거기(페스트)서 벗어날 확률은 
3분의 1이라는 사실을 알아 두세요."(32p)

위 대화는 의사 '리외'가 자신을 도우려는 동료 '타루'에게 페스트의 감염 확률을 이야기하는 장면이다. 죽을 확률 '3분의 1'이라는 위험을 무릅쓰고 타자를 위한 헌신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그는"왜 당신 자신은 신을 믿지 않는데도 그렇게 헌신하는 겁니까?(31p)"라는 동료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한다.


"나는 어찌 보면 이 직업에 추상적으로 들어섰어요. 그도 그럴 것이 난 이 직업이 필요했고, 또 다른 직업과 마찬가지로 이 직업도 사회적 지위, 
그것도 젊은 사람들이 목표로 하는 사회적 지위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어요...(중략) 그런 다음에는 사람들이 죽어 가는 것을 보아야 했어요. 죽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압니까? 한 여자가 죽는 순간에 '절대 안 돼!'라고 소리치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있나요? 나는 있어요. 그때 난 그런 것에 익숙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32p)

리외는 그의 헌신을  '신'을 위해서 라거나 '사랑', '박애'와 같은 대의적 차원의 행위는 아니라고 선을 긋는다. 그는 그저 '담담히' 자신의 일을 해나가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단지  죽어가는 사람의 아픔에 공감하기 때문이며 따라서 도망치지 않고 성실히 자신의 일을 해 나가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다. 리외는 자신을 영웅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오히려 경계한다.


혼란의 시기에 사회는 처형의 대상이 될 '마녀'를 찾기도 하지만 반면 '영웅'을 간절히 바라고 찬양한다. 중국에서 최초로 코로나 바이러스의 위험성을 공개적으로 알리고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헌신하다 사망한 의사 '리원량'에 대한 칭송이  대표적 예이다. 물론 그의 행위는 영웅적이며 멋졌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영웅적'인 것에 함몰되어 지나치게 되는 많은 부분이 있다는 점이다. 우리 주변의 보이지 않는 영웅들에 관한 이야기다. 전염의 위험성에 크게 노출된 채 일하는 의료진의 헌신, 가짜 뉴스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전문가들, 조용히 도움과 봉사의 손길을 내미는 시민들과 같은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리외적' 인간으로 조용히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생명을 구하고 있는 영웅들이다. 



 코로나 19 관련 대국민 sns 응원릴레이. 출처:강화군 자원봉사 센터 블로그




전염병은 언제나 우리를 도사리고 있다?


내가 명명백백히 알고 있는 것은, 각자가 페스트를 자기 속에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그 누구도 그 해를 입지 않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잠시 방심해서 감염균을 내쉬어 다른 사람의 얼굴에 붙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스스로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도 나는 날 압니다. 미생물은 자연적입니다. 그 이외의 것, 건강, 온전함, 무결점 등을 원하신다면, 그건 의지에 달려 있어요. 결코 멈춰서는 안 될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선량한 사람, 거의 누구도 감염시키지 않는 사람이란 가능한 한 방심을 안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방심하지 않으려면 의지가 있어야 하고, 긴장해야 합니다. 페스트 환자로 있어야 한다는 것은 매우 피곤한 일입니다. 하지만 페스트 환자로 있기를 원치 않는 것은 더 피곤한 일입니다. (58p)


소설 속  또 다른 히어로 '타루(페스트 환자들을 돕다 결국 사망하게 되는 인물)'   말이다. 카뮈는 이렇듯 소설 속 등장 인물을 통해 계속해서 무언가를 경계하고 있다. 균이나 바이러스는 이 시기가 끝난다고 해서 모두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경고다.



<패스트>의 마지막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리외는 이 연대기가 최후의 승리의 연대기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중략) 그는 책에서 읽을 수 있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페스트 간균은 결코 죽거나 사라지지 않고, 수십 년간 가구나 옷 속에서 잠들어 있을 수 있어서, 방, 지하실, 짐 가방, 손수건, 폐지 속에서 참을성 있게 기다리다가 사람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주기 위해 쥐들을 깨워 그것들을 어느 행복한 도시에서 죽으라고 보낼 날이 분명 오리라는 사실을 말이다. (70p)


페스트 간균은 결코 죽거나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 즉 우리에게는  (코타르적) 이기심과 (파늘루적) 냉담이 언제나 도사리고 있으며 그 실체를 드러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점을 기억하고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위의 두 병(이기심과 냉담)은 어쩌면 생물학적 전염병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당장 무엇을 해야 할까?  소설 <페스트>는 '리외'와 그의 동료들이 보여준 공감과 연대를 통해 그 답을 제시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급속히 퍼지는 병 치료와 예방을 위해 어느 병동, 격리 시설, 행정 기관 등에서 땀 흘리며 일하고 있는 분들, 할 수 있는 일을 해 나가는 성실한 사람들이 이 위기를 타파해 나가고 있다. 우리 주변의 영웅들이다.



페스트, 카뮈, 더클래식,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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