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8)

토끼에게 간은 없었다

by 이유진 봄해

이미지 출처: ChatGPT 생성형 AI — 실제 인물이 아닌 ‘상징적 인물’의 표현입니다.


손이 머리카락을 쥐었다. 갈래를 나누고 당겨 넘겼다. 손끝이 귀 뿌리를 스칠 때마다 치솟던 열이 가라앉았다. 하얀 두 귀가 머리카락 아래로 덮였다. 머리에서 손이 떨어지고 등 뒤의 숨소리가 끊어졌다.


“소희야. 아빠는 다시 돌아올 거야.”

어둠 속. 엄마의 손바닥이 소희의 뺨을 감싸 쥐었다. 피부에 소금기가 묻어났다. 뺨에서 손이 떨어졌다.


소희가 눈을 떴다. 이 방에서 잠들면 건너갔다. 나무 침대. 군화 소리. 고무와 피 냄새. 옆자리. 남자가 누웠던 이불이 구겨져 있었다. 베개 위, 머리가 닿았던 눌린 자국. 소희가 빈자리 위에 손바닥을 얹었다. 체온이 남아 있지 않았다.


카운터 너머 유리문은 잠겨 있었다. 어젯밤 벗겨둔 신발이 문턱 바닥에 그대로 있었다. 복도 끝. 닫혀 있던 빈방 문이 열려 있었다. 시멘트 바닥의 먼지 위. 맨발 자국 하나가 찍혀 있었다. 발자국은 방 안쪽 놋대야 앞에서 끊어졌다. 문 쪽으로 돌아 나온 흔적은 없었다.


머리 위 하얀 귀가 떨렸다. 빈 대야 안에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여러 개의 숨. 하나의 숨이 끊어지면 다른 숨이 그 위를 덮었다. 아빠도 소희의 귀를 보았다. 피가 멎은 뒤 사라졌다. 돌아올 거라 했지만 돌아오지 않았다. 소희의 손이 문틀을 쥐었다. 손가락 관절뼈가 하얗게 불거졌다.


문턱을 넘지 않았다. 눈에서 밀려난 물이 뺨을 타고 턱 밑으로 떨어졌다.




정진이 사무실 의자에 몸을 묻은 채 수첩을 넘겼다. 휴대폰 진동이 책상을 때렸다.


“… 형부가 사라졌어. 어젯밤부터. 언니가 전화했는데 나 지금 못 가거든. 오빠 혹시…”


정진이 수첩 표지를 덮었다.

“주소 보내줘.”


현관 벨이 울렸다. 문이 열렸다. 이나가 서 있었다. 얇은 면 소재의 홈웨어 원피스. 밑단은 무릎 위에서 끊어졌다. 젖이 찬 가슴이 옷감을 앞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핏발 선 눈. 수분이 마른 입술.


“정진 오빠?”

“연이가 연락했어. 들어가도 돼?”

이나가 비켜섰다. 거실 소파 가죽 위 검붉은 핏자국. 그 옆에 놓인 휴대폰.


“괜찮아?”

이나가 식탁 의자를 뺐다. 정진이 맞은편에 앉았다.

“말해 줄 수 있어?”


이나의 손톱이 식탁 원목을 긁었다.

“어젯밤에. 거실에 피가 있었어. 쿠션에. 바닥에도. 그리고 없었어. 휴대폰을 두고.”


“피가 어디서 난 건지 알아?”


이나 손이 멈췄다.

“팔꿈치 안쪽에. 주삿바늘 자국 같은 게 있었어. 본인도 모르겠다고 했어.”


“다른 이상은?”


“긴 귀를 봤다고 했어. 사람 머리 위에 솟은 긴 귀…”

거기까지 말하고 입을 닫았다.


정진이 두 손을 식탁 위에서 모았다.

“남편이. 약에 손댄 건 아닌지.”


이나 눈이 벌어졌다.


“수사하면서 많이 봤어. 주사 자국. 출혈. 환각.”


“아니야. 그런 사람 아니야.”


“나도 아닐 거라고 생각해.”

정진이 목소리를 낮췄다.


“아닌 경우가 더 많았어. 아닐 거야.”

이나의 솟았던 어깨가 가라앉았다.


“실종신고 해야지?”


“기다려 봐.”


“왜.”


“신고 넣으면 조사 들어와. 핏자국. 주사 자국. 환각. 경찰이 어떻게 볼지 몰라.”


이나 입이 벌어졌다가 닫혔다.


“개인적으로 알아볼게. 며칠만 기다려.”


방 안에서 아이 울음이 넘어왔다. 이나가 일어섰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밑단이 허벅지 맨살을 스쳤다. 이나가 안으로 들어가고 방문이 닫혔다.


정진이 일어서서 방문 앞으로 다가갔다. 두 번의 노크.

“나 물 한잔 마셔도 될까?”


“싱크대에 컵 있는데… 잠깐만, 내가 줄게.”


“괜찮아. 내가 마실게.”

정진의 손이 문고리를 돌렸다. 한 뼘.


벽에 기댄 이나. 풀어헤쳐진 앞자락. 가슴의 맨살이 드러나 있었다. 아이의 뒤통수가 한쪽에 파묻혀 있었다. 이나의 시선이 문 쪽으로 꺾이기 전, 정진이 문을 당겨 닫았다. 마찰음 없이 문틀이 맞물렸다. 정진이 싱크대로 향했다. 식탁 위. 이나가 쓰던 유리컵. 표면에 붉은 립스틱 자국이 찍혀 있었다. 컵을 집어 정수기 밑에 댔다.


물이 차오르는 동안 시선은 닫힌 방문에 머물렀다. 나무 문 너머로 젖을 삼키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정진이 컵을 입으로 가져갔다. 컵의 테두리를 돌려 립스틱 자국 위에 자신의 입술을 겹쳤다. 물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컵을 쥔 손을 내리지 않은 채 닫힌 문을 응시했다.


현관 도어록 번호가 눌렸다. 잠금이 풀리는 쇳소리. 서연이 들어섰다. 코트를 입은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싱크대 앞에 컵을 든 정진이 서 있었다.


“오빠, 와 있었어?”


“바로 왔어.”


“아 맞다. 아직 말 안 했는데. 언니는?”


“방에.”


서연이 코트를 벗으며 방문 쪽으로 걸었다. 정진이 컵을 내려놓고 서연의 등 뒤에 섰다. 서연이 문고리를 밀었다. 어깨너머로 벌어진 틈. 홈웨어 앞자락이 열려 있었다. 두 가슴이 드러난 채. 아이가 젖에서 입을 떼고 있었다. 이나의 얼굴이 들렸다. 서연. 그리고 그 뒤의 정진.


이나의 손이 앞자락을 쥐고 위로 끌어올렸다. 서연이 방 안으로 들어가며 문을 닫았다. 정진은 닫힌 문 앞에 서 있었다.


“서연. 나 그만 갈게.”


방 안에서 옷감이 스치는 소리. 이나의 낮은 목소리가 흘렀다. 이내 문이 열리며 서연이 반쯤 몸을 내밀었다.


“당분간 내가 여기 있을게. 와줘서 고마워, 오빠.”


정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해.”

현관 타일 위. 구두코를 꺾어 신은 정진이 닫힌 방문을 한 번 더 본 뒤 문턱을 넘었다.




진료실 복도. 정진의 옆에 섰던 남자가 유리벽 앞에 섰다. 유리창 너머 선영. 스웨터를 머리 위로 끌어올리는 사이 맨 배가 드러났다. 허벅지 뒤쪽으로 퍼진 검붉은 핏멍. 남자가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선영이 옷을 내리며 고개를 들었다. 눈 밑이 검었다.


“착상 확인됐어.”

선영의 손이 맨 배 위로 향했다가 떨어졌다.


“한 달은 몸 움직이지 마. 매일 전화해. 몸 상태. 체온.”


남자가 안주머니에서 수첩과 펜을 꺼냈다.

“지금 사는 데가 어디야.”


선영의 이빨이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동화여관.”


수첩 위를 긁던 펜촉이 멈췄다.

“동화여관?”


“관덕정 근처요.”


“거기 여관 주인이 누구야.”


“주인은 모르겠고… 젊은 여자가 관리해요.”


남자가 수첩을 접어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선영은 배 위에 손을 올린 채 손가락을 떨고 있었다.


“이제 시작이니 잘해. 끝나면 약속한 잔금 치를 테니까.”

남자가 유리문을 밀고 나갔다.


텅 빈 사무실. 남자의 손이 서랍 레일을 당겼다. 나란히 포개진 여러 개의 여권들. 그 옆에 놓인 선영의 신분증 하나. 서랍이 닫혔다. 남자가 휴대폰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차량 확인했습니다.”


“……”


“네. 운전석 밑에 넣어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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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잊혀서는 안 될 역사의 상처를 기억하며 쓰였습니다. 작품 속 인물과 사건은 모두 허구입니다.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