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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볕 Nov 01. 2022

엄마의 김치

시간을 먹습니다


"김치 안 떨어졌어? 지난번 거 다 먹었을 텐데 가지러 와!"

"아직 좀 남았어요. 떨어지면 가지러 갈게요."

"너는 그거 가져간 지가 언젠데 아직도 다 안 먹었어? 집에서 밥은 해 먹고사는 거야?"


휴대폰 너머로 들리는 엄마의 목소리가 한 톤 높아진다.  잔소리가 시작되려는 찰나, 바로 가지러 겠다고 말하고 서둘러 전화를 끊는다.


결혼하고 따로 살림을 꾸린지도 어언 15년이 지났다. 주부 9단까지는 아니어도 웬만한 집안일은 그럭저럭 해내 40대 후반의 주부가 되었지만 아직 혼자서 못하는 게 있으니 바로 김장이다. 엄마 표 김치를 가져다 먹는 게 습관이 되기도 했고, '으면 사 먹지 뭐.'라는 생각으로 지내다 보니 한 번도 혼자서 김치 담글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내가 결혼한 후 엄마는 딸과 사위가 굶지나 않을까 걱정되셨는지 종종 밑반찬과 김치를 해서 갖다 주셨다. 한두 번 받아먹다 보니 편하기도 하고 또 수고비를 핑계로 용돈도 드릴 수 있어서 아직까지 엄마표 김치를 먹고 있다. 


우리는 무뚝뚝한 모녀지간이다. 주변을 둘러보면 다들 엄마와 살갑고 애틋하기 그지없는데 우리 모녀는 속정은 있지만 그걸 겉으로는 잘 드러내지 않는다. 아니 못 드러낸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딸 많은 집의 둘째 딸로 태어나서 외할머니에게 사랑과 관심을 받아본 적이 없었던 엄마는 자식들에게 사랑을 표현하는데 서투셨다. 가끔은 다정할 때도 있으셨지만 대개는 엄하고 무서우셨다. 매도 자주 드셨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었던 건  해주시는 음식 덕분이었다. 한국전쟁을 겪은 세대인 엄마는 ‘잘 먹이는 것’에 대한 집착이 크신 편이었다. 가게 일에 집안일까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셨지만 늘 아침에 새 밥을 짓고 취나물 볶음, 도라지 무침, 우엉조림 같은 손이 많이 가는 반찬(당시 나는 이런 몸에 좋은 반찬보다 비엔나소시지가 더 좋았지만)을 해서 우리 삼 남매의 도시락을 싸주셨다. 라면이나 과자를 먹지 못하게 하신 대신 감자, 고구마, 옥수수를 쪄 주셨고, 비 오는 날에는 돼지고기와 김치를 잔뜩 넣은 부침개를 부쳐 주시거나 찹쌀가루와 수수가루를 섞어 익반죽 한 후 팥소를 넣어 부꾸미를 해 주셨다. 이렇게 부침 요리를 하는 날은 부엌 전체가 고소한 기름 냄새로 가득 찼다. 설에는 뽀얀 고깃 국물 위에 예쁜 색색깔 고명을 얹은 떡국이, 추석에는 뒷산에서 주운 솔잎을 넣어 쪄낸 송편과 직접 빚은 통통한 만두와 자르르한 기름옷을 입은 전이 밥상에 올랐다.


성인이 되어 어린 날의 식탁을 떠올릴 때면 새삼 엄마에게 감사함을 느낀다. 살갑고 다정한 분은 아니셨지만 음식을 만들어 자식들 입에 넣어주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인 분이셨다. "아이구, 오지네." 당시 엄마는 입 안 가득 음식을 넣고 우물거리는 먹성 좋은 나와 동생들을 보며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그때 엄마 얼굴에 넘쳐흐르던 흐뭇함, 그게 엄마의 사랑이었음을 이제는 안다.


70대 노인이 된 엄마는 요즘도 쉬지 않고 부엌에서 음식을 만드신다. 나물을 무치고, 묵을 쑤고, 복숭아 병조림을 만들고 약밥을 찌신다. 국산 유기농 재료를 사용했다는 점을 몇 번이나 강조하시며 금방 상하니 꼭 제 때 챙겨 먹으라고 당부하신다. 김장철이 되면 절인 배추를 사다가(예전에는 배추도 다 직접 절이시다가 몇 해 전부터 힘드신지 절인 배추를 주문하신다.) 무, 쪽파, 갓 등 속재료에 배, 양파, 마늘, 생강, 청각, 액젓 등을 넣은 양념을 버무려 김치를 담그신다. 이젠 눈이 침침해지셔서 한 두 번 리카락이 나온 적이 있지래도 엄마표 김치는 여전히 좋은 재료와 갖은양념에서 우러난 깊은 맛 덕분에 시원하고 맛깔스럽다. 


몇 해 전부터 엄마에게 이젠 나이도 있으시니 김치를 사 먹자고 설득하고 있는데 고집을 꺾지 않으신. 몸을 움직일 수 있는 한은 직접 김치를 담가서 자식들을 먹이실 태세다. 무심한 아들딸이지만 노모 혼자 김장을 하시라고 할 수는 없으니 김치를 담그실 때마다 가서 거든다. 그래서 김장날은 모처럼 온 식구가 모여 얼굴을 마주한다. 일손이 많다고는 해도 추운 날씨에 속재료를 다듬고, 산처럼 쌓여있는 배추에 양념을 버무리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 엄마는 자식들이 힘들세라 미리 밑 작업을 해놓으신다. 와서 가능한 한 일을 덜 도록. 그 마음을 알기에 엄마의 김치를 먹을 때면 코 끝이 찡해진다. 해가 갈수록 마르고 작아지는 엄마가 한 포기, 한 포기 양념을 버무려 김치통에 담고 김치냉장고에서 오래도록 숙성시킨 그 수고와 시간을 먹는 것이기에 내게는 더없이 귀하고 소중한 음식이다.


창 밖을 보니 저 멀리 산 능선에 걸쳐져 있던 먹구름이 스멀스멀 다가오고 있다. 곧 비라도 뿌릴 기세다. 이런 날에는 두툼한 삼겹살과 묵은지를 넣고 뭉근하게 끓인 김치찜이 제격이다. 덜컥! 냉장고를 열고 김치통을 꺼낸다. 엄마의 김치를 가지러 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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