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언니를 만난 날, 내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말이었다.명동교자를 안지는 꽤 오래되었지만 좋아하게 된 지는 얼마 안 되었다. 30대 초반 광화문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 동료들과 먹었던 명동교자의 첫맛은 사실 그저 그랬다. 쫄깃하고 꼬들꼬들한 식감을 좋아하는 내게 이곳의 국수면과 만두는 부드럽다 못해 흐물흐물해서 별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그래서 가까운 곳에 있었음에도 거의 발걸음을 하지 않다가 남편과 사귀면서 다시 찾기 시작했다. 그가 이곳의 칼국수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닭육수로 끓인 국물을 떠먹으며 연신감탄사를내뱉는 남편을 보면 신기했다. 나한테는 느끼하게 느껴지는 후추 향 가득한 국물이 그에게는 마치 '영혼의 닭고기 수프'라도 되는 것 같았으니까. 그 뒤로 몇 번 이곳을 찾았지만 내겐 그저 여느 칼국숫집과 다를 바 없었는데, 어느 추운 겨울날 그 생각이 바뀌게되었다.
추위에 뻣뻣하게 굳은 손을 비비며 자리에 앉자마자 칼국수 두 그릇을 주문했다. 얼만 안 되어 뜨끈뜨끈한 음식이 우리 앞에 놓였고 국물에서 올라오는 김이 남편의 안경에 뿌옇게 서렸다. 후루룩후루룩! 뿌연 안경을 끼고 만화캐릭터 같은 모습으로 앉아서 맛있게 칼국수를 먹는 그를 보자 웃음이 나왔다. 배도 고프고 추위에 시달렸던 터라 나 역시 뜨끈한 국물이 반가웠다. 젓가락을 들어 면을 입으로 가져갔는데 점도 높은 짭짤한 국물을 머금은 면에서 감칠맛이 느껴졌다. 평소라면 선호하지 않았을 푹 퍼진 식감이 그날따라 꽤 괜찮았다. 부드럽고 매끈하게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면을 음미한 후, 고명으로 나온 만두를 집어 들었다. 길고 얇게 빚은 만두는 국물이 잘 배어 있어간이 적당했다. 칼국수 한 그릇의 양이 꽤 많았는데 다 먹고 추가로 리필한 면까지 남김없이 먹어치울 만큼 과식을 하고야 말았다.
그날 이후 이 집 칼국수 맛에 눈을 떴다. 국물이 잘 베어든 부드럽게 씹히는 면과 만두가 좋았고, 마늘이 가득 들어간 알싸한ㅡ함께 먹으면 칼국수가 끝없이 들어가는ㅡ김치가 입맛을 돋웠다. 거기다 가격도 크게 부담스럽지 않아서 이곳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명동에서 친구나 지인을 만날 때면 자연스레 이 집을 찾게 되었고 그래서 얼마 전 H언니를 만났을 때도 이곳으로 향하게 되었다.
지난여름에 방문한 이후로 꽤 오랜만에 찾은 터라 긴 대기줄이 늘어선 식당의 풍경이 낯설었다. 코로나 기간 동안 명동에 관광객이 줄어서 이곳에 올 때마다 한산했는데이제는 완전히 예전의 활기를 되찾은 모습이다. 긴 줄에 잠시 갈등하던 우리는 점심을 먹으러 나온 인근 직장인들과 외국인 관광객의 대열에 합류했다. 다행히 두 명이라 금방 자리가 났다.
혼잡한 식당 안은 시장의 북새통을 떠올리게 했다. 행주를 들고 다니며 테이블을 치우는 직원들과 그 사이를 비집고 다니며 음식을 서빙하는 로봇으로 어수선했다. 처음에는 이런 풍경이 이질적이었는데몇 년 새 익숙해졌다.
칼국수 두 그릇과 만두 한 판을 주문하고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음식이 테이블에 놓였다. 역시 K 식당의 속도란. 불향이 나는볶은 고기가 수북하게 올려진 칼국수는 언제 봐도 먹음직스럽다. 그리고 겹겹이 주름 잡힌 찐만두, 이게 꽤 맛있다. 한 입 베어 물면 촉촉한 육즙과 진한 고기 맛을 느낄 수 있다.
H언니는 먹으면서 연신 맛있다고 감탄을 했고, 온전히 먹는 행위에 집중하며 즐거움을 느끼는 그 모습이 내게묘한 만족감을 주었다. 누군가가 진심으로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는 게 꽤 즐거운 일이라는 걸(내가 한 요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새삼 느꼈다. 그래서 다들 그렇게 먹방을 보는가보다.
빨리 먹고 빨리 일어나야 하는, 테이블 회전율이 빠른 식당이다 보니 요금은 선불이다. 요즘 같은 고물가시대에 1만 원 초반의 가격에 양까지 푸짐한 미쉐린 맛집이라니 감사할 일이다. 그것도땅값 비싸기로 소문난 명동 한 복판에서 말이다.
1966년 개점한 이래 변치 않는 맛으로 사랑받아온 명동의 터줏대감 맛집인데 뒤늦게 이곳의 매력을 알게 되었다. 추운 날, 뜨끈한 육수에 말아낸 칼국수 한 그릇이면 마음까지 따뜻해진다. 착한 가격과 넉넉한 인심을 자랑하는 이곳이 오래도록 명동의 맛집으로 남아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