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카이 생활이 지겹다고요?

가끔은 관광객이 되는 것도 필요해

by 봄볕


지루함. 보라카이와는 거리가 먼 단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지자 조금씩 무료해졌다. 숙소와 어학원 근처 레스토랑은 한두 번씩 다 가봐서 익숙해졌고 처음엔 벅찬 감동을 주던 바다도 매일 보다 보니 무덤덤해졌다. 인간은 적응을 빨리 하는 만큼 싫증도 빨리 느끼는 것 같다.


사실 보라카이 생활이 지루해진 건 익숙함보다는 한정된 예산 탓이 더 컸다. 짧게 머물다 가는 관광객이라면 매일 신선한 씨푸드와 다양한 해양 스포츠와 화려한 나이트라이프를 즐기며 심심할 틈이 없겠지만, 우리는 장기체류자이다 보니 생활비를 아껴야 해서 그럴 수 없었다. 특히나 보라카이는 필리핀에서도 물가가 비싸기로 악명 높은 곳이 아닌가.


남편과 나는 식비를 아끼기 위해 평일에는 장을 봐서 밥을 해 먹고 간혹 외식을 하더라도 현지인들이 즐겨 찾는 저렴한 식당을 이용했다. 해변에 있는 분위기 좋은 '관광객용' 식당은 주말이나 특별한 약속이 있을 때만 가는 것으로 정했다. 한정된 예산 안에서 학원비, 숙소비, 식비 등을 충당해야 하므로 매일 돈을 펑펑 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알뜰 모드'로 지내다 보니 점점 재미가 없어졌다. 힘들게 이곳까지 왔는데 매일 가계부만 들여다보며 지낼 수는 없었다. 단조로움을 극복하고 활기를 되찾기 위해 우리는 예산이 허락하는 선에서 가끔은 관광객으로 살아보기로 했다. 이번 글에서는 우리가 방문했던 몇 곳의 리조트를 소개해본다.



1. 담장 안쪽의 화려한 세계



관광객으로 살기 위해서는 우선 생활공간을 떠나야 했다. 머물고 있는 숙소비용이 아깝긴 했지만 쓰린 속을 달래며 넓은 수영장이 딸린 4성급 리조트를 예약했다. 여러 개의 수영장을 보유하고 있고 풀파티로 유명한 페어웨이 & 블루워터 리조트였다. 오픈한지는 좀 되어 시설이 낡은 편이었지만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었고 무엇보다 가격이 합리적이었다. 특히 형형색색의 레이저 불빛을 쏘며 화려하게 밤을 수놓는 풀파티는(비록 하룻밤이긴 했지만) 여행객으로 돌아간 기분을 충분히 느끼게 해 주었다. 먼지 가득한 바깥의 풍경만 보다가(해변을 제외한 보라카이의 생활공간은 열악한 편이다.) 초록 잔디가 깔리고 넓은 수영장이 푸른 바다와 맞닿아있는 리조트 내부를 보니 이런 편의를 누릴 수 있음에 감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렇게나 다른 세상이 펼쳐지다니! 3년이 지난 지금, 이제는 바깥의 삶도 조금은 더 풍요로워졌길 바라본다.



2. 보라카이에서 느끼는 발리의 숨결



보라카이에는 투숙객이 아니어도 호텔이나 리조트의 부대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데이트립 상품이 많이 있었다. 우리는 그중 어학원 근처이기도 하고 현지인 강사들도 많이 추천하는 리조트 한 곳을 방문했다. 로비에서부터 인도네시아 발리에 온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아샤 프리미어 스위트 리조트.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분위기가 인상적이었고, 야외수영장 바닥에 자연석을 깔아 두어 발을 디딜 때 느껴지는 감촉이 좋았다. 자연친화적인 분위기를 위해 세심한 부분까지 신경 쓴 흔적이 보였다. 게다가 사람을 잘 따르는 애교 많은 고양이도 있었다. 던져주는 음식을 야무지게 받아먹고 날카로운 발톱으로 꾹꾹이를 하더니 내 선베드에서 늘어지게 낮잠까지 자던 그 귀여우면서도 뻔뻔한 고양이가 생각난다. 아직 건강하게 잘 있겠지?



3. 밤의 정취에 취하는 곳



보라카이 최고의 리조트에 항상 이름을 올리는 샹그릴라 리조트. 하지만 장기체류자인 우리 부부가 하룻밤 기분전환을 위해 예약하기에는 비용 부담이 커서 레스토랑만 이용하기로 했다. 레스토랑은 높은 절벽 위에 위치하고 있어서 테이블에 앉으면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 기분 좋게 얼굴을 감쌌다. 친절한 웨이터는 식사가 나오기 전에 다양한 포즈를 요구하며 능숙하게 사진을 찍어주었다. 어느덧 주문한 음식들이 나왔고 어둠이 내려앉는 가운데 식사를 시작했다. 한층 깊은 색으로 갈아입은 하늘과 바다, 철썩대는 파도소리, 달그락거리는 식기 소리가 밤의 고요함과 어우러져 그 순간의 기억으로 내게 스며들었다. 우리가 주문한 스테이크는 아쉽게도 입맛에 맞지 않았지만 친절한 서비스와 깊어가던 밤의 풍경 덕분에 그곳에서의 시간은 아직까지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4. 빈둥빈둥 게으르게 누워있고 싶다면



보라카이에 머문 지 한 달쯤 되었을 때, 남동생과 여동생 가족이 우리를 보기 위해 방문했다. 숙소는 모벤픽 리조트. 투숙객이 아닌 우리는 데이트립 상품을 구매해야 리조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북적거리는 중심지에서 벗어나 산자락과 바다를 끼고 호젓하게 자리한 리조트에는 가족 단위 여행객이 많이 보였다. 넓은 수영장과 키 큰 야자수와 해변가에 있는 바는 휴양지의 정석 같은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긋하게 수영을 즐기고 나서 보송보송한 타월로 몸을 감싼 채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칵테일을 들이켜니 몸이 나른해져 왔다. 늦은 오후의 햇살이 기분 좋게 얼굴을 간지럽히던 오후였다. 바람, 음악, 모든 것이 완벽했던.



5. 위치도, 가격도, 맛도 좋은 곳



매번 특급호텔 상품만 이용한 건 아니었다. 보라카이에는 가격이 저렴한 데이트립 상품도 있는데 바로 스테이션 X의 메인스트리트에 위치한 휴 호텔이었다. 이곳은 스테이션 2와 3 사이에 있어서 접근성이 좋고 마사지샵, 푸드코트 등의 다양한 편의시설을 보유하고 있었다. 수영하다가 출출해져서 풀사이드 레스토랑에서 파스타를 주문해서 먹었는데 생각보다 꽤 맛이 좋았다. 가성비 호텔이라 음식에는 별 기대가 없었는데 시장이 반찬인 건지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난다. 호텔 수영장은 하늘이 시원하게 뚫려있는 구조여서 답답하지 않았고, 한 편에는 풀바까지 마련되어 있어서 수영하면서 칵테일을 즐길 수 있었다. 선선한 밤바람에 취기 오른 얼굴을 식히며 찰박찰박 물장구를 치던 그곳에서의 밤이 요즘도 가끔 그리워지곤 한다.






영원한 낙원은 없다. 어느 곳으로 가건 그곳이 일상의 영역으로 자리 잡는 순간이 온다. 무료함이 찾아올 땐 잠시 관광객으로 살아보면 어떨까. 익숙한 공간에서 벗어나 새로운 환경에서 가슴 뛰는 경험을 하면 몸과 마음이 충전되어 더 열심히 살아갈 에너지가 생긴다.


일상을 벗어난 곳에서 또 일상을 벗어나 보기.

보라카이에서 장기체류를 계획하는 분들이라면 꼭 한번 해보기를 추천하는 바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