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어학원에는 영국에서 온 괴짜 뮤지션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S인데 블라복 비치 근처에 있는 현지인 동네에서 살고 있었다. 정글처럼 수풀이 우거진 곳에 그의 소박한 이층 집이 자리하고 있었다. 학생들 말로는 영국에서 결혼도 했고 자녀도 있다는데 혈혈단신으로 이 섬나라까지 와서 살고 있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는 그룹수업 담당 강사이면서 헤드 티처로서 현지인 강사들을 교육하는 역할도 맡고 있는 듯했다.체계적이고 정확한 스타일이라기보다는 느슨하고 다소 즉흥적인 것 같았다. 원래 성격이 그런 건지 더운 기후에 적응해서 살다 보니 여유롭게 변한 것인지 알 길은 없었다.
어느 날 오전 수업을 마치고 점심을 먹고 있는데 초대장을 받았다. S의 집에서 와인파티 겸 작은 음악회를 연다는 것이었다. 각자 참가비를 내고 참석하는 방과 후 액티비티였다. 일말의 기대감을 안고 남편과 참석하기로 했다. 우리 말고도 예닐곱 명의 학생들이 참석 의사를 밝혔다.
파티는 금요일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숙소에서 쉬다가 시간 맞춰 S의 집으로 갔다. 이제 막 이십 대 중반이나 되었을까. 앳된 얼굴의 현지인 강사들이 한껏 솜씨를 발휘하여 다과를 차려 놓았다. 그의 집 이층은 강사 숙소로 사용되고 있는데 거기에 묵고 있는 몇 명의 선생들이 액티비티가 있을 때마다 이렇게 준비를 하는 모양이었다. 투박하지만 정겨운 상차림을 보니 입가에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얇게 썬 빵에 치즈와 살라미를 얹어 입으로 가져갔다. 마트에서 사 왔음직한 와인도 한 잔씩 했다. 새로운 학생들과 통성명을 하고, 먹고 마시면서 대화를 이어갔다. 낯을 가리는 성격이라 이런 자리가 불편하게 느껴지는 나에 비해 남편은 즐거워 보였다. 나이를 잊고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그는 새로운 환경에 완벽하게 적응한 것처럼 보였다.
해질 무렵 드디어 연주회가 시작되었다. 왱왱거리며 날아다니는 모기를 쫓기위해 팔다리에 벌레 퇴치용 스프레이를 뿌려가며무대에 시선을 고정했다. S는 과장된 표정과 몸짓을 지어가며 경쾌한 곡을 연주하기시작했다.
현지인 밴드도 초대되어 S와 협연을 했다. 쿵짝쿵짝 요란한리듬을선보이는, 락인지 레게인지 모를, 처음 들어보는 장르의 곡이었다. 대중적인 음악 취향을 가진 내게 그의 음악세계는 다소 낯설었다. 하지만 어둑어둑한 정글의 분위기, 풀벌레 소리, 그리고 사람들의 환호성과 박수소리 덕분에 곧 이질감을 극복하고 흥겹게 분위기에 동화될 수 있었다.
한참 열기가 무르익을 무렵, S는 학생들의 참여를 유도했다. 아니나 다를까 평소 기타 연주를 즐기던 남편이 손을 번쩍 들고 무대로 나가 그의 18번인 Extreme의 More Than Words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라! 늘 듣던 대로 안정되게 연주할 줄 알았는데 기대와 달리 음이 엇나가는것이 아닌가. 남편은 당황한 것처럼 보였지만 곧 평정심을 되찾고 연주를 계속했다. 나중에 물어보니 어두워서 악보가 제대로 보이지 않은 데다 다른 사람의 기타로 연주하다 보니 손에 익지 않아서 잠시 버벅거렸단다. 어쨌거나 남편의 실수에도 사람들은 뜨거운 환호를 보냈다.
한창 달아오른 밤의 열기, 입안에 남아있던 쌉싸름한 와인의 맛, 얼근히 오르던 취기, 사람들의 박수와 웃음소리... 한국에 돌아오고 난 이후에도 그 밤이 종종 기억난다. 그리고 문득 궁금해진다. 가슴이 시키는 대로 살아가는 자유로운 영혼 S는 아직도 보라카이에서 잘 살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