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이에 다시 학생이 될 줄이야

어학원에서의 첫날

by 봄볕


오늘은 어학원 레벨테스트가 있는 날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우유와 시리얼로 간단히 아침을 먹고 학원으로 향했다. 걸어가면 30분 정도 걸리지만 덥고 습한 날씨 때문에 트라이시클을 타기로 했다.


보라카이에서 트라이시클을 탈 때는 손수건이 꼭 필요하다. 낡은 교통수단에서 뿜어내는 매연과 자욱한 도로 먼지는 그냥 들이마실 수 있는 수준이 아니기 때문이다.


15분 남짓 달려 어학원에 도착했다. 우리가 머물던 당시 보라카이에는 어학원이 두 곳 있었는데 우리는 그중 P 어학원을 선택했다. 한국에서 교수로 근무한 적이 있는 캐나다인이 운영하는 학원이고 다양한 국적의 학생 비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P어학원. 전체적인 시설은 다소 낡았지만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는 느낌이었다.



첫날이라 서두르다 보니 너무 일찍 도착한 탓이었을까. 우리가 어학원에 도착했을 때는 아무도 없었다. 좀 기다리다 보니 하나 둘 학생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나무로 얼기설기 엮어 대충 시멘트를 바르고 페인트칠을 해 놓은 듯한, 지극히 로컬스러운 공간에서 필기시험을 치르고 강사와 1:1 구두 테스트를 진행했다. 결과는 곧 나왔고 advanced level 반으로 배정되었다. 영어에서 손 뗀 지 한참 된 것치고는 의외의 결과였다.


오늘은 첫날이라 수업이 없다고 했다. 대신 트라이시클로 섬 투어를 한 후 시티몰에서 생필품을 사는 일정으로 진행된다고 했다. 대만, 일본, 러시아에서 온 학생들과 함께 낡고 덜덜거리는 트라이시클을 타고 다시 도로의 매연을 들이마시며 섬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투어라고 이름 붙이기엔 다소 민망한 - 학원이 있는 스테이션 3에서 시티몰이 있는 스테이션 1까지 이동하면서 중간에 보이는 마트나 식당, 병원을 알려주는 - 일정이었다.


보라카이는 어학연수로 최적화된 곳이 아니다 보니 어학원의 시설이나 프로그램에서 아쉬운 부분이 있을 수 있다. 아카데믹한 분위기가 아니어서 영어실력 향상을 기대하는 사람보다는, 휴양지에서 영어를 사용하며 다양한 국적의 친구를 사귈 기회를 누리고 싶은 사람에게 만족할만한 선택이 되리라고 본다.





드디어 목적지인 시티몰에 도착했다. 시티몰은 보라카이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현대식 쇼핑몰이다. 대도시의 큰 쇼핑몰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마트, 영화관, 푸드코트, 식당, 오락실 등 아쉬운 대로 구색은 갖추고 있어서 무료한 섬 생활에 그나마 낙이 되는 장소이다.


쇼핑 시간은 1시간이 주어졌다. 게임에서 퀘스트를 수행하듯 정해진 시간 안에 서둘러 필요한 물품들을 샀다. 바리바리 장 본 비닐봉지를 들고 다시 트라이시클에 올라탔다. 대만, 일본에서 온 여학생은 어학원 기숙사에서 같은 방을 쓰는 룸메이트였다. 둘 다 쾌활하고 밝은 성격이었다. 러시아에서 온 남학생은 키가 크고 창백한 피부를 지니고 있었고, 우리 부부처럼 외부 숙소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그의 영어는 러시아식 악센트가 너무 심해서 알아듣기 힘들었다.


새로 사귄 친구들과 어렵사리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내릴 때가 되었다. 낯선 이들에게 어색한 작별인사를 건네고 숙소에 와서 장본 것들을 대충 정리했다. 사 온 재료로 저녁거리를 만들자니 귀찮은 생각이 들어 근처 로컬 식당으로 향했다. 볶음밥과 치킨을 포장해와서 숙소에서 산미구엘 맥주를 곁들여 저녁을 먹었다.


낯선 환경에서 어둑해지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니 갑자기 묘한 기분이 들었다. 평소라면 퇴근하고 집에서 저녁 먹을 시간에 닭 울음소리와 따갈로그어가 들리는 이국의 섬에서 부슬부슬한 쌀밥 요리를 먹고 있는 상황이 새삼 생경하게 느껴졌다.


어색함, 불안, 설렘, 기대... 다양한 감정 속에서 보라카이의 두 번째 날이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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